목차
1. 제국주의 대두: 독점 자본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 결합
19세기말, 제국주의의 흐름이 동아시아 지역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독점 자본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한 새로운 흐름을 가져왔습니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제국주의 열강들의 압력과 영향 아래에서 현대화와 개항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19세기 중반, 동아시아 지역은 청과 일본의 근대화 운동으로 인해 변화의 기류에 휩싸였습니다. 청은 영국과의 아편 전쟁을 통해 난징 조약을 체결하며 개항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 지역은 각국의 영향 아래에서 개항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특히, 일본은 미국의 미화 정책에 응해 미일 화친 조약을 체결하면서 근대화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2.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와 통상수교 거부 정책과 양요
1) 흥선 대원군의 개혁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은 조선 후기 세도정치 시대 아들 고종을 왕위에 세우고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을 위해 여러 독자적인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안동김씨 세력을 몰아내고 세도 정치를 타파하고자 비변사를 축소 및 폐지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부활하였고, 고른 인재를 등용하였습니다. 경복궁의 중건과 서원 철폐 등을 통하여 왕권 강화와 정치안정을 꾀하였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양전 사업과 호포제, 사창제 등을 실시하였습니다.
2)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그리고 통상수교 거부정책
흥선 대원군은 세도 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고 왕권 강화와 민생안정을 위하여 여러 개혁 정치를 하였지만, 경복궁 중건과 당백전 발행 등으로 인하여 민심을 잃기도 하였습니다.
흥선 대원군은 외교정책으로 통상수교 거부 정책을 펴게 되는데, 이는 두 번의 양요와 오페르트 도굴 사건과 관련이 깊습니다.
병인양요는 1866년 병인박해를 이유로 프랑스군 강화도 침입한 사건입니다. 병인박해는 흥선 대원군이 천주교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선교사 9명이 사망하였는데 이를 이유로 프랑스함대가 2차례 조선을 침략하였습니다. 이때 프랑스 함대는 강화도를 점령하고 외규장각 등 많은 문화재를 약탈했습니다.
신미양요는 병인양요 직전 일어난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미군이 800여 명이 군함 5척으로 강화도에 침입하였고 조선은 어재연 광성보 항전 등 완강히 저항하였습니다.
병인양요 2년 뒤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조선이 통상을 거부하자 대원군의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 하였습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로 인하여 조선의 서양에 대한 분노는 더욱 커졌습니다.
두 번의 양요와 오페르트도굴사건 등을 겪으며 조선은 서양 세력에 대한 두려움과 적대감은 더욱 커지고,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통상수교 거부 정책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러한 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 정책은 일시적으로 외세의 침략을 막았다는 긍정적인 의의도 있지만, 조선의 근대화를 지연시켰다는 한계점을 가지게 됩니다.
3. 개화 정책과 위정척사 운동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근대적 개혁운동을 통해 사회변화를 꾀하였습니다. 청은 양무운동을 통해 중체서용을 주장하며 근대 산업 시설의 도입을 꾀하였으며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하여 문명의 개화와 중앙 집권적 입헌군주제를 수립하였습니다.
1) 개항과 불평등 조약
조선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불리는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을 통하여 개화를 시작하게 됩니다. 일본의 운요호 사건을 원인으로 1876년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은 최초의 근대 조약으로 제물포, 원산, 부산 세 항구를 개항, 일본에 해한 측량권과 영사 재판권 허용 등 불평등 조약입니다. 이후 청의 알선으로 관세자주권, 미국에 최혜국 대우를 포함한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청의 영사 재판권을 허용, 청 상인의 내지 통산권 확보가 담겨있는 조청 상민 수륙무역 장정 등 서양 열강들과 여러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는 모두 불평등 조약입니다.
2) 개화정책과 위정척사운동
개항과 더불어 조선은 개화 정책을 총괄하는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여 개화파 인사를 등용, 별기군 창설, 사절단 파견 등과 같이 여러 개화 정책을 실시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화 정책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반대의 목소리도 나오게 되는데 양반 유생의 통상`개화`개항 반대운동으로 대표되는 위정척사 운동이 대표적입니다. 위정척사 운동은 성리학적 질서를 고집하며 반외세 반침략적 민족운동으로 1860년대는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서학이 전파되는데 이를 사학으로 간주하여 실학과 함께 배척하며 유하원, 이경명 등이 중심이 되어 천주교 배척운동을 하였습니다. 1870년대에는 두 양요 후 본격적으로 외세 침략이 이루어지자 기정진, 이항로 등이 중심이 되어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지지하며 개항 반대운동을 하였습니다. 1880년대엔 개화 정책에 반발하였고 1890년대 이후에는 항일 의병 운동으로 계승됩니다.
3) 임오군란
조선의 개화 정책의 불만은 임오군란을 통하여 폭발하게 됩니다. 1882년 구식 군인들과 신식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로 쌓여가던 분노가 체불된 임금을 저급 불량쌀로 지급되면서 폭발하게 됩니다. 구식군대로 시작 하층민이 합세하며 규모가 커진 반란군은 궁으로 쳐들어가 민씨 중심의 정부 고관과 일본일 교관을 살해,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게 됩니다. 이때 실각되었던 흥선대원군이 재 집권을 시도하였으나 명성황후는 청에 도움을 요청하고 청의 도움을 받아 임오군란을 진압하게 됩니다. 그 결과 명성황후와 민씨는 다시 권력을 장악하고 흥선대원군은 청나라로 끌려가게 됩니다.
임오군란 후 조선은 청과 청 나라의 군대를 조선에 주둔하며 청 상인의 내륙무역을 허용하는 등 청의 내정간섭과 경제적 침투속도를 증가시키는 조` 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 일본과는 일본에 막대한 배상금 지불과 일본 공사관에 일본인 경비를 주둔시키는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4. 갑신정변의 전개
19세기말, 조선의 개화사상은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로 나뉘는데, 전자는 청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삼아 점진적인 개혁을 주장했고, 후자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방하여 적극적인 개화 정책을 주장했습니다.
임오군란 이후 심화된 청의 내정간섭으로 조선의 개화정책은 소극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급진 개화파는 일본의 힘을 입어 1884년 우정총국 개국 축하 연회에서 정변을 일으킵니다(갑신정변). 이때 14개 조 정강이 발표되었으며, 주된 내용은 청나라 간섭의 배제, 조세제도 개혁, 문벌제도 타파 등을 담았습니다. 그러나 3일 만에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조선은 일본과는 불탄 일본공사관 피해 복구와 피해본 일본인들에게 피해 보상금을 지불하고, 일본에 사과하는 한성 조약을 맺고, 청과 일본은 각각 자국의 군대를 조선에서 철수시키고 후에 조선에 출병할 경우 서로 통보할 것을 내용으로 담은 톈진 조약(청-일본)을 체결하였는데 톄진조약은 후에 청일 전쟁의 원이 되기도 합니다.
이후 조선은 열강의 각축 지역이 되었습니다. 국내는 청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며, 청과 일본의 대립이 격화되었고, 국외는 영국과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지역의 식민지 확장을 두고 대치 중이었습니다. 이때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1885년 4월 거문도를 점령하게 됩니다(거문도 사건). 이에 조선은 청의 도움을 받아 영국국의 철수를 바랐지만 영국군의 거부로 무산됩니다. 후에 1887년 2월 영국은 러시아와 협상하고 거문도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거문도 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유길준 등은 조선을 벨기에와 같은 중립국으로 만들자는 조선의 중립국화를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5. 동학 농민 운동의 전개
동학 농민 운동은 1894년에 일어난 대규모의 농민봉기 운동으로 국가 재정 악화, 농민 생활 악화, 일본에 배상금 지불 등의 배경 속에서 전개되었습니다. 19세기 말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가 등장하였습니다.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신분제 폐지, 외세의 배격, 민중의 권리 보호 등을 주장하며 급격히 확산되었습니다.
1984년 3월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의 횡포로 시작된 1차 봉기는 조병갑에 의해 지은 만석보라는 인공 저수지를 파괴하고 전봉준을 중심으로 황토현•황룡촌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정부는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하였고 일본 또한 군사를 파견하였습니다. 4월에는 전주성을 점령하며 정부와 전주 화약을 맺고 일시적으로 봉기를 중단하였습니다. 농민군을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고 농민들의 요구를 반영한 폐정개혁안 12개 조를 발표하며 여러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정부도 교정청을 설치하였으나 결국엔 받아들여지지 않아 큰 개혁은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폐정개혁안 12개 조는 탐관오리 처벌과 부패 관리 축출, 토지 분배, 노비 문서 소각, 외세침략반대, 신분차별 철폐 등이 주된 내용입니다. 또한 그들은 기존의 민씨정권을 반대하고 흥선대원군 중심의 새 정치를 주장하는 정치적 주장도 하였습니다.
1차 봉기 이후 잠시 평화가 유지되는 듯하였으나 조선에 파견된 청나라와 일본 군사로 인하여 정세가 불안해졌습니다. 특히 일본은 이를 기회로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1894년 6월 청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농민군은 조선에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하여 2차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농민군은 전라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일본군의 강력한 신식 무력에 의해 여러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결국 우금치전투에서 크게 패하며 전봉준 등의 지도자가 체포되었습니다.
동학농민 운동은 조선 말기 일어난 최대의 민중 운동으로, 단순한 농민 반란이 아니라 사회 개혁과 외세배척을 목표로 반봉건 반외세의 조적적이고 정치적인 운동이었습니다.
6. 근대적 개혁의 추진(갑오개혁)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기 위해 조선에 내정 개혁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개혁 강요에 의해 조선은 근대 개혁을 추진하게 되었고 그것이 갑오개혁입니다.
1894년 7월 1차 갑오개혁은 청일 전쟁 중에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조선에 내정 개혁을 요구하였고 , 이에 따라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습니다. 주된 내용은 교정청 폐지 군국기무처 설치, 신분제 철폐, 과거제 폐지, 탁지아문 설치, 재판소 설치 가 있습니다.
1차 개혁 후 일본의 개혁 압박은 더욱 심해졌고 이에 김홍집, 박영효 연립내각이 1984년 12월 구성되면 2차 개혁이 추진되었습니다. 2차 개혁 주요 내용은 의정부와 6조 폐지, 지방 행정 개혁, 교육 제도 개혁 이 있습니다.
그 후 정부는 최초의 근대 헌법적 성격을 가진 홍범 14조를 발표하였습니다. 주된 내용은 근대적 정치제도 도입, 청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단절하는 자주독립 등을 담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조선은 근대적 개혁의 길을 걸었지만 자발적으로 추진된 개혁이 아니라 일본의 주도에 의한 개혁이라는 한계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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