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조선 사회 변화
1) 농업의 발달과 사회 변화
왜란과 호란을 겪고, 붕당이 변질되고 탕평책이 실시되었으나, 후에 세도 정치에 의해 정치 기강이 문란해진 조선 후기에는 사회와 경제 구조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으며, 이러한 변화는 농민 봉기와 상품 화폐 경제 발달과 관련이 깊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농업에서 모내기법의 확대가 이루어졌습니다. 모내기법은 전국적으로 보급되었고, 이에 따라 노동력이 절감되고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였습니다. 이러한 모내기법의 보급은 경작지 확대와 상품 작물의 재배를 촉진시켰으며, 일부 농민은 부농으로 성장하고 토지를 잃고 몰락한 농민이 증가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농업 발달과 도시 인구 증가를 배경으로 상업이 발달하였습니다. 상업 활동은 다양한 면에서 활발해졌습니다. 대동법의 실시로 왕실과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대량으로 구입하는 공인이 등장했습니다.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허용되면서 사상 성장이 이루어지고, 상업이 더욱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물품을 거래하는 장시가 발전하고 보부상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며, 물자가 모이는 포구가 상업의 중심지로 발달하였습니다. 청, 일본과의 대외 무역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일부 사상들이 대상인으로 성장하였고, 화폐의 유통도 활발해져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엔 수공업과 광업도 발달하였는데 장인들이 세금을 내고 자유롭게 물품을 만들어 장시에 내다 팔게 되어 민영 수공업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수공업의 발달로 광물의 수용가 증가하여 광업이 발달, 정부가 민간인에게 광산채굴을 허용하게 됩니다.
2) 신분제 동요
조선 후기에는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가 동요되면서 각 신분 계층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양반 붕당 정치의 변질로 소수의 양반만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서 양반 계층의 분화가 일어났습니다. 중인은 서얼들이 문과 응시와 주요 관직 진출의 제한 철폐를 요구하였고 기술직 중인은 전문적인 능력과 경제력으로 신분 상승을 추구하였습니다. 상민층은 일부 부유해진 농민이나 상인들이 공명첩을 구입하고 호적이나 족보를 위조하여 양반 행세를 하기도 했습니다. 천민 중에서는 납속을 이용하거나 군공을 세워 신분 상승을 추구하였으며, 도망치거나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노비종모법을 실시하여 순조 때 공노비 중 수만 명을 양인으로 해방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상민과 천민의 수가 감소하고 양반의 수가 크게 증가하면서 신분제의 동요가 가속화되었습니다.
3) 삼정의 문란
세도 정치 시기 특히 백성을 힘들게 하는 것은 삼정의 문란입니다.
조선 후기의 삼정은 조세와 관련된 세 가지 주요 제도로, 토지세인 전정, 군역의 군정, 곡식 대여제도인 환곡을 말합니다.
전정의 문란
전정은 토지세를 부과하는 제도로, 조선 정부는 토지의 면적에 따라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토지의 실제 면적을 제대로 측정하지 않거나, 지주들이 자신의 토지를 숨기는 일이 많아지면서 세금 징수가 불공정해졌습니다. 지방 관리들은 자신의 재정 확보를 위해 농민들에게 실제 토지보다 더 많은 세금을 부과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양반 지주들은 자신들의 토지를 토지 대장에 올리지 않거나, 가짜 토지 문서를 제출하여 세금을 회피하였습니다. 그 결과 실질적인 세금 부담은 소작농이나 일반 농민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군정의 문란
군정은 군역을 관리하는 제도로, 모든 양인 남성이 군사 의무를 지는 제도였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양반과 부유층이 군포(군역 대신 납부하는 포) 납부 의무에서 면제되는 경우가 많아졌고, 그 부담이 일반 농민들에게 전가되었습니다. 군역이 면제된 양반 대신 농민들이 군포를 대리 납부하는 일이 일상화되었고, 관리들은 이를 악용하여 농민들에게 더 많은 군포를 징수하였습니다. 군포 징수는 부풀려졌고, 군역을 부담하지 않던 사람들도 군포를 납부해야 하는 부당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1750년 영조가 군역법을 통해 군포 부담을 절반으로 줄였으나, 군역의 부담은 여전히 일반 농민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한 결작 등 추가 세금이 도입되었으나, 이것이 오히려 농민들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환곡의 문란
환곡은 국가가 흉년이나 재해를 대비해 농민들에게 곡식을 대여해 주고, 이후에 갚도록 하는 제도였습니다. 이는 원래 농민들을 돕기 위한 제도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인해 심각한 문란이 발생했습니다. 관리들은 환곡을 농민들에게 빌려주면서 과도한 이자를 요구하였고, 그로 인해 농민들은 환곡을 갚지 못해 점점 더 큰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환곡은 농민들을 돕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오히려 농민들을 경제적 고통에 빠뜨리는 고리대화된 부정부패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관리들은 국가에서 제공한 환곡을 착복하고, 부족한 곡식을 농민들에게 부당하게 징수하는 일도 자주 발생했습니다. 이러한 환곡의 문란은 특히 흉년이나 재해가 발생했을 때 농민들의 고통을 가중시켰습니다.
임술농민봉기 이후, 조선 정부는 삼정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삼정이정청이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조세제도를 개혁하려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일시적인 방편에 불과했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삼정의 문란은 조선 후기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관리들의 부패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삼정의 문란이 초래한 농민 봉기와 사회적 혼란은 조선 왕조의 체제 붕괴를 예고하는 신호였습니다.
4) 천주교와 동학
세도 정치로 인해 사회 불안이 증가하자, 『정감록』과 같은 문헌이 유행하였고, 미륵 신앙 및 무속 신앙이 번성하였고 새로운 종교가 대두되었습니다.
천주교
천주교는 18세기 후반부터 남인 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조선에 전파되었습니다. 천주교는 처음에는 종교로서 보다는 하나의 서양 학문(서학)으로 소개되었으나, 점차 그 교리와 사상이 신앙의 형태로 자리 잡았습니다.
조선에서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확산된 계기는 1784년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사건입니다. 이승훈은 조선 최초의 세례자이자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이후 조선 내에서 천주교를 전파하는 역할을 맡게 됩니다. 그는 조선의 지식인들과 함께 천주교의 교리를 학습하며, 이를 통해 천주교는 서서히 조선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천주교는 기존의 유교적 사회 질서와 신분제에 대한 도전적인 사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천주교 교리는 인간의 평등과 만민의 형제애를 강조했으며, 이는 신분 제도가 엄격했던 조선 사회에서 매우 혁신적인 사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하고,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습니다. 특히, 1801년 신유박해는 천주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의 시작점이었습니다. 당시 천주교 신자들은 신유박해를 통해 수천 명이 처형되었고, 그중에서도 이승훈을 포함한 많은 천주교 지도자들이 희생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 정부가 천주교를 강력히 억압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에도 천주교 신자들은 지속적으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천주교는 탄압 속에서도 계속해서 전파되었고, 1839년 기해박해와 1846년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체포되어 처형된 병오박해, 1866년의 병인박해를 거치며 더 많은 신자들이 처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신앙은 조선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동학
동학은 19세기 중반, 조선 사회가 내외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등장했습니다. 조선 후기의 세도 정치로 인한 정치적 부패와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농민들의 경제적 어려움은 극에 달했습니다. 여기에 서양 세력과 일본의 침략이 조선에 대한 위협을 가중시키면서, 조선 사회는 정치적 혼란과 민중들의 고통이 깊어져 갔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최제우는 민중의 고통을 해결하고,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새로운 사상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동학을 창시하였습니다. 그는 1860년 경주에서 동학을 창조하며,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종교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동학은 유교, 불교, 도교 등의 전통적 사상과 함께 서학(천주교)의 평등사상에서 영향을 받아 탄생하였으며, 당시 조선 사회의 혼란을 극복하고자 하는 민중적 요구를 반영한 종교였습니다.
동학의 핵심 사상인 인내천은 모든 인간이 하늘과 같은 존엄한 존재임을 의미하며, 인간의 평등과 존엄성을 강조합니다. 이는 신분제에 기초한 조선의 유교적 질서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었으며, 모든 인간이 차별 없이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는 사상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인내천 사상은 동학이 계층과 신분을 초월한 민중 운동으로 확산될 수 있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시천주는 모든 사람들이 하늘(천주)을 모시고, 하늘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동학의 종교적 교리입니다. 시천주는 인간 내면에 하늘이 존재한다고 믿으며, 이를 통해 인간은 신성한 존재임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교리는 인간의 내적 수양과 도덕적 책임을 중시하며, 도덕적 깨달음을 통해 사회적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을 담고 있습니다.
동학은 또한 후천개벽이라는 사상을 통해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예언했습니다. 후천개벽은 기존의 사회적 모순과 불평등을 해소하고,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는 신념을 반영합니다. 이는 동학이 단순한 종교 운동을 넘어, 사회적 변혁을 추구하는 혁신적 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동학은 보국안민, 즉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이념을 중요시했습니다. 이는 동학이 조선 사회의 혼란과 외세의 침략 속에서 나라를 지키고, 민중의 삶을 안정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음을 보여줍니다. 동학은 외세의 침략을 거부하고, 조선의 자주성과 민중의 권리를 수호하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삼았습니다.
동학이 민중 사이에서 빠르게 확산되자, 조선 정부는 이를 사교로 규정하고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1864년, 최제우는 혹세무민 혐의로 처형당했으나, 동학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그의 제자들에 의해 계속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최시형이 동학의 교주로서 최제우의 뒤를 이어 동학을 체계화하고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편찬하는 등 교세를 확산 전국으로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동학은 단순한 민족 종교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외세의 침략에 맞서 나라를 지키고, 자주성을 수호하려는 구국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가졌습니다. 특히 동학농민운동은 일본과 서양세력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조선의 자주성을 지키고자 한 민족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은 비록 실패했지만, 이후 항일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외세의 침략에 맞서 자주국가를 지키려는 정신을 확산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2. 농민봉기
세도 정치로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삼정이 문란해지며 민중의 불만은 점점 커져 결국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게 되는 데 대표적인 것이 홍경래의 난과 임술 농민 봉기입니다.
1) 홍경래의 난
19세기 조선 후기에는 민중과 양반 사이의 갈등이 증폭되었습니다.
조선은 유교적 질서에 따라 사대부 중심의 정치 체제를 유지하였고, 이를 통해 중앙 정치권력은 주로 경상도, 전라도 출신의 남인과 노론들이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평안도는 서북인이라는 이유로 중앙 정치에서 배제되었고, 중앙 정부는 평안도 출신 인사들에게 고위직 진출을 제한하는 등 차별을 지속했습니다.
평안도는 상업과 교역이 발달한 지역이었지만, 정치적 차별로 인해 경제적 번영에도 불구하고 지역민들의 불만이 심화되었습니다. 이 지역 상인들과 농민들은 중앙 정부의 지나친 세금 부담과 지방관들의 수탈에 시달렸고, 이에 대한 불만이 결국 1811년 12월 홍경래의 난으로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몰락양반 출신인 홍경래는 양반의 신분을 가졌지만 평민과 다름없는 삶을 살게됩니다. 1791년 초시의 일종인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다음 해인 1978년에 소과에 떨어지고 사회를 향한 불만은 더욱 커졌습니다.
1811년 홍경래는 평안도 지역의 농민, 향리, 무사, 상인들과 함께 봉기를 일으키고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여 청천강 이북지역을 점령하였습니다. 그러나 홍경래를 비롯한 지도부는 함께한 이들을 만족시킬만한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였고 점점 힘을 잃게 됩니다. 그러다 정부군의 공격으로 인해 이 봉기는 정주성에서 패배하고 진압되었습니다. 비록 100일 만에 실패로 끝났지만 홍경래의 난은 19세기에 처음으로 일어난 대규모 농민 봉기로서 이후 19세기 농민 봉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2) 임술농민봉기
삼정의 문란은 조선 후기의 사회 불안을 심화시켰습니다. 백성들은 과도한 세금과 횡포에 시달리며 생계가 악화되고, 농업생산력은 떨어지고 흉년까지 겹치면서 농민의 고통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백낙신의 수탈에 반발한 진주의 농민들이 유계춘을 중심으로 봉기를 일으킴으로써 진주 농민 봉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진주에서 시작된 봉기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지로 빠르게 퍼지며, 각 지역의 농민들은 지방 관아를 습격하여 환곡창고를 열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경상도 진주에서 시작되었지만 전라도까지 번진 해가 임술년(1862년)이기에 이를 임술 농민 봉기로 불립니다.
정부는 봉기를 수습하기 위해 관리(암행어사)를 파견 하고 삼정이정청을 설치하는 등의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책들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하지 못하였기에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홍경래의 난과 임술 봉기는 조선 후기 민중과 양반 간의 갈등과 사회 불안을 반영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세도정치 말 조선 민중의 불만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줍니다. 비록 무력진압으로 실패했지만 조선정부의 제도적 문제를 강하게 드러냈으며 이후 개혁운동과 더 큰 민중봉기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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