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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조선의 건국

by 신난베짱이 2023. 11. 2.

대한민국_국보_파란색어의를_입고_왕좌에_앉은_조선_초대왕_태조
국보 조선태조어진(출처: 국가문화유산포털)

 

목차

    1. 조선의 건국

    조선의 건국(1392년)은 고려왕조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변화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성계와 신진 세력들은 고려의 부패한 정치질서를 타파하고, 유교 이념에 기반한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위해 조선을 창건했습니다. 조선의 건국 과정은 외교적 갈등, 신진 세력과 구세력의 대립, 그리고 왕권 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정비하려는 움직임 등을 배경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 고려말기 조선 건국의 배경

    고려말기 국외는 중국에서 원이 쇠퇴하고 명나라가 새롭게 부상하며 고려는 원과 명 사이에서 외교적 갈등에 휘말리게 됩니다.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도 빈번해지며 국가의 안보가 위협받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졌습니다. 국내적으로는 원과 명의 외교적 문제로 중앙에서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하며 정치적 혼란을 겪고, 권문세족이 정치와 경제를 장악하여 부정부패가 심화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국가재정은 악화되고 농민들의 반란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성계를 비롯한 신진 세력들은 새로운 질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2) 이성계의 등장과 신진사대부의 부상

    1335년 함경도 영흥에서 태어난 이성계는 고려 말 북방 지역을 방어하던 변방 무장 집안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자춘 또한 여진족을 제압하며 이름을 떨친 장군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활쏘기와 무술이 뛰어났던 이성계는 고려의 유능한 무장으로, 왜구와 홍건적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 군사적 명성을 얻었습니다. 특히 1380년 왜구를 크게 물리친 황산대첩은 고려의 왜구 토벌사에서 중요한 승리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는 점차 고려의 정치와 군사 권력을 장악하게 되며, 고려 왕실 내에서 중요한 인물로 부상합니다.

    이성계는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와 협력하였습니다. 신진사대부들은 유교적 개혁을 통해 새로운 사회 질서를 세우고자 했으며, 이성계와 함께 새 왕조 건설을 도모했습니다. 

    3) 위화도 회군

    1388년 고려의 권신 최영과 왕인 우왕은 혼란스럽던 국외 문제를 해결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명나라의 요동을 정벌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성계는 두 가지 주요 이유를 들며 원정에 반대했습니다. 첫째, 국내는 가뭄과 기근으로 민생이 어려워 원정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둘째, 명나라와의 충돌은 외교적 위험을 초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영의 강경한 주도로 원정이 강화되며 이성계는 총사령관으로 차출되어 요동 정벌군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원정을 떠난 이성계는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지금의 중국 단둥 부근)에 이르렀으나, 그곳에서 회군을 결심합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후퇴가 아닌, 정권 교체를 목적으로 한 정치적 결단이었습니다. 회군의 결과, 이성계는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돌아가면서 빠르게 고려 조정을 장악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최영은 체포되어 처형당하고 우왕은 폐위되고 이어서 그의 아들 창왕도 곧 폐위되었습니다.  후에 1389년 명목상 왕에 불가한 공양왕을 옹립하고 고려왕조는 완전히 이성계의 권력 안에 들어가게 됩니다.

    4) 고려왕조의 몰락과 조선의 건국

    공양왕을 옹립하고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들은 고려의 정치를 개혁하며 왕권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개혁과정에서 이성계와 신진 세력은 구세력(권문세족과 온건파사대부)의 저항을 받아 여러 차례 충돌했습니다. 온건파 사대부로 대표되는 정몽주는 고려 광조의 충성스러운 신하로, 무력에 의한 왕조 교체를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는 고려 왕실과 신흥 세력 간의 협력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결국 이성계와 그의 지지자들이 계획하는 조선 건국을 인정하지 았았습니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측근인 정도전과 여러 차례 충돌하면서 왕조 교체를 둘러싼 갈등이 극에 달하게 됩니다. 이때 이성계의 아들인 이방원(훗날 태종)은 정몽주가 아버지의 개창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판단하고, 1392년 개성의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암살팜으로서 온건파 사대부의 저항을 제거했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 건국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으며, 고려 왕조의 마지막 충신으로 여겨지는 정몽주의 죽음으로 고려의 종말은 확정되었습니다. 

    결국 이성계는 1392년 공양왕을 폐위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며 조선을 건국했습니다.

    5) 건국 후 통치체제 정비와 통치 이념의 확립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유교 이념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아 왕도 정치를 실현하려 했습니다.

    조선의 건국 세력들은 유교를 바탕으로 한 도덕 정치를 이상으로 삼고, 고려시기와 다른 중앙 집권적 왕권 체제를 확립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정도전은 조선의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여 왕조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지방 세력의 자치권을 제한하고, 중앙 정부가 모든 권력을 행사하도록 했습니다. 관리들에게 과전법에 따라 경제적 보상을 지급함으로써 중앙 정부에 충성하도록 유도했습니다. 과전법은 고려말 시행되었는데 이는 권문제족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한편, 신진 사대부가 안정적으로 조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였습니다. 또한 군사력을 왕이 직접 통제할 수 있도록 하여, 지방 세력이 군사권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건국 초기 이성계의 후계자 문제를 둘러싸고 왕자들 간의 내분(왕자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결국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올라 왕권 강화를 이끌었습니다.

    6) 조선 건국의 의의

    조선 건국은 단순한 왕조 교체가 아니라 새로운 유교적 질서를 기반으로 한 근대적 국가의 출발점이었습니다. 고려의 혼란과 부패를 극복한 조선은 유교 이념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며, 이후 약 500년간 번영을 이어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