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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신라의 분열과 후삼국 "한반도 역사의 전환기"

by 신난베짱이 2023. 10. 13.

경주_불국사_삼층석탑(출처:국립문화재연구소)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출처:국립문화재연구소)

목차

    1. 신라의 분열과 후삼국의 성립


    신라, 한반도에서 형성된 강력한 국가였지만, 말기에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동요가 증가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신라에서 정치적 동요가 생겼습니다. 진골 귀족들의 반란으로 혜공왕이 희생되었고, 왕위 쟁탈전이 심화되었습니다. 지방 세력도 왕위를 노리는 움직임을 보이며 혼란이 커졌습니다. 김헌창의 난, 장보고의 난 등이 그 예시입니다.
    중앙 정부가 지방에 세금을 독촉하면서 농민들의 불만이 폭발했습니다. 원종과 애노의 난(상주`사벌주, 889)을 시작으로 농민 봉기가 확대되었으며, 농민들은 지방에 피난하는 일도 발생했습니다. 농민 봉기는 이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이러한 동요로 인해 지방 세력, 즉 호족들의 성장이 나타났습니다. 호족들은 독자적인 군사를 보유하고 자신의 근거지에 성을 쌓아 지방을 실질적으로 지배했습니다. 이로써 지방에는 독자적인 통치 기구가 확립되었으며, 중앙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립적인 지방 세력이 형성되었습니다.
    또한, 6두품은 고려 시대 골품제의 모순으로 관직 진출이 제한되어 있었으며, 이에 반발하여 사회 비판을 펼쳤습니다. 최치원, 최승우 등의 일부 6두품은 골품제의 모순을 비판하고 사회 개혁안을 제시했으나 수용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새로운 사상이 유행했습니다. 이 중에서 선종은 인간의 마음에 내재한 깨달음을 중시하며, 교종의 전통적인 권위에 도전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풍수지리설은 신라 말 시기 선종 승려인 도선에 의해 보급되었으며, 지리 개념을 탈피하고 지방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성종 풍수지리설 모두 지방 호족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위와 같이 신라말 내부 동요와 약화 지방 세력의 성장으로 인해 후삼국이 성립되었습니다.
    900년 견훤이 호족 세력을 모아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건국, 후백제는 오늘날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서부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습니다.
    901년엔 궁예가 송악(개성)에 도읍하고 후고구려를 건국하였습니다. 후고구려는 국호를 마진, 태봉 등으로 변경하고 오늘날 황해도, 경기도, 강원도 일대의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후백제와 후 고구려로 인해 신라 세력은 남한반도에서 경주 부근의 경상도 일대만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2. 남북국의 문화

    신라에서는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유학을 중요한 정치 이념으로 채택했습니다. 이로써 신문왕 시기에 국학을 설립 유학을 교육하였고, 원성왕 시기에 독서삼품과가 실시되어 강수, 설총, 최치원, 김대문 등의 유학자들을 배출했습니다.
    불교 역시 신라에서 발전했는데, 이는 고구려와 백제의 불교를 흡수하고 당 유학 승려들이 새로운 불교 교리를 소개한 결과입니다. 대표적인 승려로는 화쟁 사상을 주장, 아미타 신앙을 전파하여 불교의 대중화에 기여한 원효, 화엄 사상 주장, 신라 화엄종 개창, 관음 신앙을 전파한 의상, 인도와 중앙아시아 등지를 순례한 후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한 혜초가 있습니다. 또한 신라 말에 당에서 선종이 유입 지방 사회를 중심을 유행하였습니다. 불교 예술에서는 다양한 작품이 생겼습니다. 사원 중에서는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이 유명하며, 탑 중에서는 경주 불국사의 3층 석탑과 다보탑 등이 대표적입니다. 승탑과 탑비 역시 눈에 띄며, 범종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상원사 동종과 성덕 대왕 신종이 있습니다. 또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역시 이 시기에 제작되었습니다.

    발해는 신라와 당, 고구려와 같은 근교 세력과 교류를 통해 다양한 문화를 수용했습니다. 발해는 통치 이념으로 유학을 반영하였고 주자감을 설치하였으며, 왕실과 귀족의 후원을 받은 불교가 융성하였습니다. 발해는 다양한 문화적 영향을 받았지만, 이를 융합하여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고구려 문화를 기본으로 당 문화, 말갈족의 토착 문화가 융합되었습니다. 당의 영향은 상경성 건설과 정효 공주 묘의 고분 양식(벽돌무덤) 등으로 나타났으며, 발해에서는 이러한 양식을 수용하여 변형시켰습니다. 고구려의 영향으로는 온돌 시설, 기와, 정혜 공주 묘의 고분 양식(굴식 돌방무덤, 모줄임천장 구조), 정효 공주 묘의 내부 천장 등이 발해에서 나타났습니다. 말갈족은 흙무덤과 말갈식 토기 등을 자랑하는데, 이러한 문화적 특성 또한 발해에서 나타났습니다.


    3. 남북국의 대외 교류


    신라는 당과 일본, 서역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당과의 교류는 가장 활발했으며, 공식적인 사절, 유학생, 승려, 상인 등이 왕래하며 다양한 분야에서 문물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당의 산둥반도에 신라방이 설치되는 등 교류가 활발했습니다. 교역품으로는 금, 은, 인삼 등이 수출되었고, 비단, 서적 등이 귀족의 사치품으로 수입되었습니다. 또한, 신라에서는 일본과 당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펼쳐 경제적 이익을 얻었으며. 신라의 불교 사상이 일본 불교에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서역과의 교역도 혜초의 순례나 신라에서 원성왕릉 무인석 등이 발견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역들은 주로 국제 무역항인 당항성과 울산항이 번성하였습니다. 이들 항구에서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서역 등과의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상품 교환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이 시기 장보고는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 소탕, 청해진을 중심으로 당과 신라 일변을 연결하는 해상무역을 장악하였습니다.

    발해 또한 다양한 교류를 통해 다른 국가들과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발해와 당은 서로 가까운 지역에 있어 교류가 활발하였습니다. 이는 발해의 문왕 때에 당과 친선 관계를 맺은 후 문물과 학문을 수용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발해는 당에서 신라와 같은 국가에서 온 사람들을 위해 발해관(숙소)을 설치하여 교류를 더욱 활발하게 했습니다. 발해와 당의 교역은 다양한 교역품을 포함하였습니다. 발해는 말, 모피, 철, 인삼 등을 당에 수출하였고, 반면 당은 비단, 서적 등을 수입하였습니다.
    발해와 일본은 초기에는 당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교류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두 나라 간의 관계가 강화되었으며, 발해가 당과의 교류를 중계하여 경제적 이익을 얻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 일본인들이 신라의 배를 통해 당과 왕래하게 되었습니다. 발해와 일본의 교역품은 모피, 인삼 등의 수출과 삼베, 황금 등의 수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발해는 신라와도 교류를 통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신라와 발해 사이의 교류는 신라의 건국 초기 대립을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신라도를 통해 교류하고 사신을 교환하는 등 관계가 이어졌습니다. 발해는 초원길을 떼라 유목 민족인 거란 등과도 교류하였습니다. 
    발해의 다양한 교류로 인해 국가와 사회의 다양한 측면이 발전하였으며, 중요한 문화적 요소와 경제적 이익을 얻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