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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의 역사는 그 깊이와 다양성으로 인해 항상 흥미로운 주제였습니다. 특히, 신라의 삼국 통일과 발해의 건국,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 운동은 남북국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건들 중 일부입니다.
1.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반의 동아시아 정세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때, 중국이 수에 의해 통일되는 등 지역 정세가 변화하고 있었죠.
이 시기에는 돌궐, 고구려, 백제, 왜를 연결하는 남북 세력과 신라, 수·당을 연결하는 동서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세에서 고구려는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수는 고구려의 요서 지방을 선제공격하며 3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는 시도를 했습니다(598). 그러나 수군은 홍수와 전염병 등으로 피해를 입어 별다른 성과 없이 퇴각하게 되었습니다.
수의 양제는 이후에도 고구려를 공격하려 했으며, 113만 명 이상의 군대를 이끌고 요동성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612년엔 살수(청천강)에서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에게 크게 패한 살수 대첩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수의 요동성 공격과 살수 대첩에서 고구려가 수군을 격퇴하면서 고구려는 수의 침략을 여러 번 물리쳤습니다.
당 건국 초기에는 고구려와 친선 관계였으나, 당 태종 즉위 후 당은 고구려를 압박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고구려는 천리장성 축조 및 군사력을 강화하였습니다. 이후 연개소문이 대막리지가 되며 권력을 장악하고 고구려는 이후 당과 신라에 강경한 대외 정책을 전개했습니다.
당 태종은 고구려에 침입하며 요동성과 백암성을 함락하고 안시성을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안시성의 성주와 백성이 당군을 격퇴하는 안시성 싸움(645)이 발생하였고, 그 이후 고구려가 당군의 몇 차례 침입을 물리쳤습니다.
고구려는 절벽과 가파른 산 등 험준한 지형을 활용하여 산성을 축조하여 방어 체제 강화와 요동 지방의 철광 지대를 확보하고, 강력한 철제 무기와 갑옷을 제작하여 뛰어난 군비를 갖췄습니다. 고구려 군대는 갑옷과 투구로 무장하고, 기병과 보병의 활약을 통해 우수한 전투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고구려가 수` 당의 침입을 막아 낸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동아시아 정세와 고구려의 독립을 토대로, 고구려가 수와 당의 침입을 격퇴하며 자주적인 국가로서의 독립을 유지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신라의 삼국 통일과 발해의 건국
남북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순간 중 하나는 신라와 당의 동맹이 체결된 648년입니다. 신라 김춘추가 당에 동맹을 제안하고 이 동맹은 나중에 삼국 통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과 부흥 운동을 보면 백제는 계백의 결사대가 황산벌 전투에서 패배하고, 나당 연합군의 공격에 사비성이 함락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백제는 멸망(660)하고 복신과 도침, 흑치상지 등에 의해 백제 부흥 운동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백강 전투에서 패배하고 나당 연합군의 주류성이 함락되며 백제 부흥 운동은 실패로 끝납니다.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후 아들들의 권력 다툼으로 정치적 혼란을 겪고, 나당 연합군의 평양성 함락으로 고구려는 멸망(668)합니다. 고구려 역시 고연무, 검모잠 등이 부흥 운동을 하지만 지배층의 분열로 실패합니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며 당은 한반도에 웅진도독부, 안동도호부, 계림도독부를 설치하여 한반도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이후 당은 신라를 침공하며 신라를 침공하며 나당 전쟁이 시작됩니다. 신라는 매소성(675)과 기벌포(676) 전투에서 당군을 격파하고, 대동강 이남에서 당 세력을 축출하여 삼국 통일을 완성합니다.(676)
신라의 삼국 통일은 대동강 이남 지역만을 차지하고 외세인 당을 끌어들인 점에서 한계점이 있으나, 이것은 우리 민족 최초의 자주적 통일로 삼국 문화가 융합되어 새로운 민족 문화 발전의 기반을 마련한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고구려 멸망 후 대조영이 지린성 동모산 근처에 도읍하고 발해를 건국합니다(698). 이로써 한반도는 통일 신라와 발해가 남북국의 형세를 이루게 됩니다.
발해의 고구려 계승 의식은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의 다수를 차지하고, 발해의 왕이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 ‘고려(고구려)’와 ‘고려(고구려) 국왕’으로 자처하여 일본이 발해를 ‘고려(고구려)’로 칭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3. 남북국의 발전과 통치 제도
통일 신라 최초의 진골 출신인 무열왕은 집사부를 독립시키고 시중(중시)의 역할을 강화 하였고, 나당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삼국 통일을 완성, 옛 백제인과 고구려인에게 관직을 하사한 문무왕,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고 진골 귀족 세력을 숙청, 통치제도를 정비하고 전제 왕권을 확립한 신문왕은 통일 신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발해 무왕은 북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당과 신라를 견제하고 장문휴를 보내 산둥 지방을 공격(732)하였습니다. 문왕은 상경(상경 용천부) 천도, 당과 친선 관계를 형성하며 교통로를 개설하여 신라와 교류하는 등 발해를 발전시켰습니다. 선왕은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연해주와 요동 지방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는데 이때 발해의 최대 영토를 확보하고 이후 중국으로부터 '해동성국'으로 불리게 됩니다.
통일 신라와 발해의 통치제도를 보게 되면
통일 신라는 중앙정치는 집사부 중심으로 운영하며 시중(중시)의 권한이 강화되었습니다. 지방은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그 아래 군과 현을 설치 지방관을 파견하였고, 5 소경을 두었습니다. 군사는 중앙엔 9 서당, 지방엔 10정을 두어 국방을 강화하였습니다.
발해는 중앙 정부를 3성(정당성 중심)으로 구성하고,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6부를 두어 행정 체제를 조직화했습니다. 지방 행정은 5 경과 15부로 구성되며 62개의 주로 정비하여 지방 행정을 강화했습니다. 군사는 중앙군 10위와 지방 군으로 분리하여 국방 능력을 향상했습니다.
통일 신라는 토지 제도를 개선하며 백성과 귀족 간의 관계를 조절했습니다. 신문왕 때에는 관료전 지급과 녹읍을 폐지하고, 성덕왕 때에는 백성에게 정전을 지급하고 세금을 수취했습니다. 하지만 경덕왕 때에는 귀족들의 반발로 녹읍이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남북국의 역사와 통치 제도는 다양한 변화와 발전을 겪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과 통치 제도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남북국의 역사를 이해하고 공부함으로써 우리의 정체성과 민족 문화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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