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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건국되고 후삼국이 통일은 한반도 역사의 중요한 순간 중 하나입니다. 이 글에서는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 나아가 고려전기 사회에 대한 주요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
고려 건국의 핵심 인물인 왕건은 궁예의 신하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최고 관직인 시중의 자리에 오르며 궁예의 권력을 끌어안았습니다. 이렇게 왕건은 궁예의 신하에서 고려 건국의 중심으로 부상했습니다.
왕건은 918년에 고려를 건국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호족들은 왕건을 국왕으로 추대하고 고려의 건국을 선포했습니다. 이후 송악으로 도읍을 옮겨(919) 고려의 중심지를 다시 정립했습니다.
고려가 건국된 이후, 한반도는 이전에 존재했던 후삼국들의 통일을 향한 과정을 거쳤습니다. 먼저 후백제의 내분으로 인해 견훤이 고려에 투항(935)하였고, 이어서 신라의 경순왕도 고려에 항복(935)하였습니다. 이에 이어 고려는 후백제를 공격하여 후삼국 통일(936)을 성취하였습니다.
고려는 신라, 후백제, 발해 등 여러 지방을 통합하여 민족의 재통합을 이루었는데, 다양한 삼국의 문화를 흡수하고 새로운 민족 문화를 발전시키는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2. 태조의 정책
태조(왕건)는 고려 건국 후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태조는 백성들을 위해 세금을 감면하고 빈민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쳐 민생 민생안정에 힘썼으며,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여 서경을 전진 기지로 삼았고, 청천강에서 영흥만에 이르는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국가의 안보를 강화하였습니다. 태조는 호족에게 왕 씨 성, 토지, 관직 등을 주어서 그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기인제도와 사심관제도를 도입하여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였습니다. 후손들이 따를 교훈을 담은 훈요 10조도 제시하였습니다.
3. 왕권 안정과 체제 정비
고려는 광종과 성종 시대에 왕권을 안정화하고 중앙 정치 제도를 개편하였습니다.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약화했습니다. 또한 과거제를 시행하여 유교적 지식과 능력을 지닌 인재를 선발하였으며, 개혁에 반대하는 공신과 호족을 숙청하였습니다. 광종은 황체 칭호 및 독자적 연호(예: '광덕', '준풍')를 사용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성종은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수용하여 유교를 국가 통치의 근본이념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통치 체제를 정비하여 2성 6부를 마련하고 12목을 설치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정치의 효율성을 높였습니다. 또한 국자감(개경)과 향교(지방)를 설립하여 유학 교육을 강화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국내에서 인재 양성에 주력하여 국가의 발전을 촉진하였습니다.
4. 고려의 통치 체제 정비
고려는 중앙 정치 제도와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하여 효율적인 행정 체계를 구축하였습니다.
중앙 정치 제도를 알아보면 중서문하성은 국가의 정책 논의를 담당하는 최고 관청으로, 장관인 문하시중이 국정을 총괄하였습니다. 상서성은 6부를 통해 주요 정책 집행을 담당하였으며, 중추원은 국왕의 비서 기관으로 군사 기밀과 왕명의 전달을 담당하였습니다.
중서문하성의 낭사와 함께 대간으로 불린 어사대는 관리의 비리를 감찰하며 정치의 잘잘못을 논의하였으며, 삼사는 국가 재정의 출납과 회계 업무를 담당하였습니다.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고려의 독자적 회의 기구로, 중서문하성과 중추원의 고위 관료들이 모여 국가 중대사를 논의하였습니다.
지방 행정 조직은 5도로 일반 행정 구역을 나누어 안찰사를 파견하였으며 이들 도 아래에 주, 군, 현을 설치하여 지방 행정을 강화하였습니다. 군과 현에는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 관리를 담당하였으며, 주현(지방관 파견)과 속현(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음) 중 속현이 더 많았습니다.
향리는 지방의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으며, 양계는 군사 행정 구역으로 북계와 동계로 나뉘어 있었고, 병마사를 파견하였고 아래에 주`군`현을 설치하였습니다. 개경, 서경, 동경(후에 남경)의 3경이 있습니다. 특수 행정 구역으로는 향(농업), 부곡(수공업), 소(수공업) 등이 있었습니다.
고려는 중앙군(2군 6위)과 지방 군(주현군, 주진 군)을 운영하여 국가의 안보를 강화하였고, 과거제를 시행하여 문과, 잡과, 승과 등 다양한 분야의 시험을 실시하였습니다. 단, 무과는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음서는 왕족과 공신의 후손, 5품 이상 고위 관료의 자손을 시험 없이 등용하는 제도였습니다.
5. 문벌 사회의 동요
고려 시대에는 문벌이 성장하였는데 이들은 왕실, 유력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고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음서와 과거를 통해 주요 관직을 독점, 권력을 이용하여 널은 토지를 차지하였습니다. 이러한 문벌 사회로 인해 고려에는 여러 문제점이 나타나며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 문벌사회가 동요되기 시작합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을 살펴봅시다.
이자겸은 왕실과의 거듭된 혼인 관계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종은 이자겸을 제거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이에 이자겸과 척준경의 반란이 일어나고, 척준경이 이자겸을 제거하였습니다. 이자겸의 난과 척준경의 반란은 왕실 내부의 권력 다툼과 충돌을 야기했으며, 왕실의 권위가 하락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서경 천도 운동은 고려 후기에 일어난 운동으로, 서경에서 나온 승려인 묘청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배경으로는 인종의 왕권 회복 노력, 금(고려 시대 중기에 나온 중국식 조세체계)을 배척하는 여론 강화, 풍수지리설(주변 환경과 자연조건의 영향을 근거로 국가의 운명을 판단하는 이론)의 유행 등이 있었습니다. 묘청과 정지상 등 서경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근거로 서경 천도를 추진하였습니다. 그러나 개경 세력의 반대로 좌절하게 되었고, 묘청 등 서경 세력은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국호는 ‘대위’로, 연호는 ‘천개’였습니다. 이에 김부식 등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서경 세력은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문벌 사회의 동요와 권력 다툼은 고려의 정치와 사회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왕실과 유력 가문의 권력 다툼은 왕권의 흔들림과 권위의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위와 같은 내용을 통해 고려의 건국과 통일, 왕권의 안정화, 통치 체제의 정비, 지방 행정 조직, 군사 제도, 관리 등용 제도, 그리고 문벌 사회의 동요와 권력 다툼 등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고려시대의 이러한 역사적 사건과 변화는 한반도 역사의 중요한 전환기를 이루고 있으며, 고려의 권력 구조와 문화의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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