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몽골의 침입과 대몽 항쟁
몽골 제국은 13세기 초반, 아시아의 거대한 제국으로 크게 성장했습니다. 이 제국은 고려에도 눈여겨봤고, 제국의 여러 지역에 대한 공물과 복종을 요구했습니다. 몽골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고려에 강요하였고, 몽골의 침입은 몽골 사신 저고여 피살을 빌미로 1231년에 시작되었습니다. 전투의 과정을 보면 귀주성(박서의 활약) 전투와 함께 충주성(관노비들의 활약) 등 방어에 노력하였지만 결국 여러 중요한 성들이 함락되었습니다. 고려의 방어군은 몽골의 침공에 패배하였고, 이에 따라 최 씨 정권은 몽골과 협상하여 침입을 막으려 했습니다. 최 씨 정권은 몽골과 강화를 체결하였고 몽골군이 고려에 다루가치를 두고 철수합니다.
이후 몽골은 고려를 더 탐내어 두 번째 침입(1232)을 강행했습니다. 이번에는 몽골의 내정 간섭이 심화하였고, 최 씨 정권의 강화도로 천도를 배경으로 일어났습니다. 과정을 보면 처인성 전투에서 승려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이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하였습니다. 하지만 1차와 2차 몽골 침입의 결과로 고려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국토는 황폐해졌으며, 많은 고려 백성이 몽골로 포로로 잡히거나 집을 잃게 되었습니다. 또한, 대구 부인사 대장경 판목이나 황룡사 9층 목탑 등 수많은 문화재와 유적물이 파괴되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기록들이 소실되었습니다.
몽골과의 강화는 고려의 왕위와 지배 체계에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몽골과 강화를 맺자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최 씨 정권이 붕괴하자 고려 태자는 몽골의 쿠빌라이와 강화를 체결(1259)하였습니다. 무신정권은 몽골의 개경 환도 요구를 거부하였고 이후 내분으로 무신정권이 붕괴하자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 환도(1270)하게 됩니다. 그러나, 몽골의 요구에 저항하는 목소리도 존재했습니다. 특히 삼별초의 대몽 항쟁은 고려의 국민들이 몽골과의 협력에 반대했던 순간 중 하나였습니다. 대몽 항쟁은 1270년에서 1273년까지 이어졌으며, 개경 환도에 반대하며 강화도에서 진도` 제주도로 이동하며 대몽 항쟁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항쟁은 결국 고려와 몽골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2. 원의 내정 간섭과 공민왕의 개혁 정치
몽골의 침입과 강화는 고려 정치와 국내 사정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원은 고려의 왕실과 정치에 직접 개입하여 많은 사건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고려 국왕은 원의 공주와 혼인하고 고려의 왕자들은 원에서 성장하며 교육을 받게 됩니다. 이를 통해 원은 고려 왕실과 직접적인 연결을 형성했습니다. 또한, 일본 원정을 목적으로 정동행성을 설치하였으나 원정이 실패된 후에도 이를 통해 고려 내정에 간섭하는 기구로 활용하였습니다. 또한, 원은 관제와 왕실 용어를 조정하여 고려의 왕실과 국민들에게 몽골 문화와 풍습을 미화하려 했습니다. 고려의 국왕은 원 황제에게 '충(忠)‘이 붙은 시호를 받게 되었으며, '폐하'라는 용어는 '전하'로, '태자'는 '서자'로 바뀌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고려의 정치와 국민들의 삶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철령 이북에 쌍성총관부, 제주엔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원이 고려 영토의 일부를 직접 지배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원은 고려의 토지와 특산물에 대한 조세를 강화하며 금, 인삼, 매 등의 특산물 요구뿐만 아니라, 공녀와 환관도 요구하였습니다. 이런 사회적 배경으로 인해 고려 지배층을 중심으로 변발이나 몽골식 복장과 음식 등 몽골풍이 유행하였으며, 원 역시 고려의 의복이나 음식 등이 영향을 주어 고려양이 전해지게 됩니다.
원의 강화와 고려 정치에 대한 간섭은 권문세족이라 불리는 고려 지배층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권문세족은 원의 세력에 기대어 부와 권력을 유지하려는 친원적 경향이 강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음서로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으며,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아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였습니다.
원의 간섭과 권문세족 사이에서 약해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왕이 공민왕입니다. 그는 정동행성이문소를 폐지,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회복하였으며, 기철 등 친원 세력을 제거, 원에 의해 격하된 고려 왕실의 호칭과 관제를 복구하고 원의 풍습(몽골풍)을 금지하는 반원 정책을 폈으며, 내정 개혁으로는 신돈을 등용하여 전민변정도감을 설치, 성균관을 정비하여 유학 교육을 강화하고, 정방을 폐지하여 인사권을 장악, 이로써 친몽골 세력을 제거하고 국내적인 통제를 강화하려 했습니다.
3. 새로운 정치 세력의 성장과 고려의 멸망
고려말 혼란스러운 시기에 신진 사대부와 신흥 무인 세력이라는 새로운 정치 세력을 향상하게 되는데. 정몽주와 정도전을 대표되는 신진 사대부는 지방의 향리나 하급 관리의 자제, 혹은 권문세족 출신 등으로부터 나온 인물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은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여 도덕과 명분을 중시하며, 과거의 경험과 관직의 역사를 통해 관직에 진출하였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사대부들은 권문세족의 비리와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며, 중국 내의 패권이 원에서 명으로 교체되던 시기에 명과의 화친을 주장했습니다. 신흥 무인 세력은 홍건적과 왜구의 격퇴 과정에서 성장한 무인으로 최영과 이성계 등이 이에 속하게 됩니다.
원의 침략 이후 원의 내정간섭, 권문세족의 권력 장악, 공민왕 등의 개혁 정치 실패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고려의 멸망은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명의 이북의 땅을 요구하면서 고려의 내분이 가중되었습니다. 우왕과 최영은 이러한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고,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며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시켰습니다. 이에 따라 이성계가 정치와 군사적인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성계와 급진파 사대부는 과전법을 실시하여 조세 제도와 토지 제도 개혁을 시행하였고, 이에 따라 권문세족의 경제적인 기반이 약화하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고려의 내정과 사회 구조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성계와 급진파 사대부는 고려의 멸망을 앞두고 연합하여 정몽주 등을 제거하였고, 조선 건국을 선언하였습니다.
이렇게 몽골의 침입과 대몽 항쟁, 원의 내정 간섭과 공민왕의 개혁 정치, 그리고 고려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고려 시대는 다양한 사건과 변화로 가득 찬 역사적인 시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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