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붕당 정치와 탕평책
1) 붕당청치
서인들이 분열하며 붕당 정치가 전개되었는데, 분당 정치는 광해군 시대에 북인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인조반정으로 북인 세력이 몰락하고 서인이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남인도 참여하여 상대 붕당의 존재를 인정하며 서로의 정책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형태였습니다.
이러한 분당 정치는 나중에 예송과 환국 등의 정치 사건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예송은 현종 때 효종과 효종비가 죽은 후 대비의 상복 입는 기간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생기며 붕당 간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환국은 숙종 때 집권 붕당을 급격히 교체하는 환국이 여러 차례 발생함으로써, 서인과 남인이 집권할 때마다 상대 붕당을 몰아내고 탄압하는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서인이 분열하고 붕당 간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로 붕당 정치는 크게 변질하게 되었습니다.
2) 탕평책
조선 중기 이후 사림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정치 세력은 크게 두 개의 붕당으로 나뉘었습니다. 초기에는 동인과 서인이었으며, 이후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다시 분화되었습니다. 각 붕당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념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다투었고, 이로 인해 조선 정국은 불안정해졌습니다. 특히 현종 시기의 예송 논쟁과 경종 시기의 붕당 갈등은 정치적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붕당 간의 극심한 대립을 해결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국가 안정을 이루고자 했던 왕들이 탕평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탕평책은 서로 다른 붕당 세력을 균형 있게 등용하여 특정 붕당의 권력 독점을 막고, 공정하고 중립적인 정치를 실현하려는 정책입니다.
탕평책의 본격적인 시작은 숙종(재위 1674~1720) 시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숙종은 붕당 간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한쪽 붕당을 몰아내고 다른 붕당을 등용하는 환국 정치를 통해 정국을 안정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숙종의 환국 정치가 오히려 붕당 간의 대립을 더욱 격화시킨 측면이 있었습니다. 이에 붕당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정책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후 영조와 정조 시기에 탕평책이 본격적으로 강화됩니다.
영조의 탕평책
영조(재위 1724~1776)는 탕평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대표적인 왕입니다. 영조는 붕당 간의 싸움이 국가를 위태롭게 한다고 보고, 정치의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탕평파라는 세력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했습니다. 그는 각 붕당의 극단적인 인물을 제거하고, 비교적 온건한 인물들을 등용하여 국정을 운영하고자 했습니다.
영조는 탕평책을 제도적으로 확립하기 위해 탕평비를 세우고, 이를 통해 왕권 강화와 붕당 정치 종식을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또한, 이조 전랑의 권한을 축소하여 특정 붕당이 관직 임명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외 영조는 여러 개혁 정치를 폈는데, 민생의 안정을 위해 균역법을 실시하고 가혹한 형벌을 금지하며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켰고, 청계천을 정비하는 등의 민생 안정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또한,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속대전』, 『동국문헌비고』 등의 문헌을 편찬하여 문화와 지식의 다양성을 증대시켰습니다.
영조의 탕평책은 비교적 성공적이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붕당 간의 대립이 다소 완화되면서 조선 사회는 안정기로 접어들었습니다.
정조의 탕평책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재위 1776~1800) 역시 탕평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면서도, 보다 강력한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그는 각 붕당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규장각을 설치하고, 초계문신제를 도입하여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고 교육함으로써 붕당의 외압에서 벗어난 인재들을 육성하려 했습니다.
정조는 자신의 측근들을 중심으로 한 친위 세력을 강화하며,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군사력의 강화를 위해 장용영을 설치하여 자신의 정권을 보호할 수 있는 군사적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수원화성 건설하여 새로운 정치의 중심지를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또한, 민생 안정을 위해 시전 상인의 특권을 축소하고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하며, 노비의 처지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습니다. 중국과 서양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고, 『대전통편』과 『탁지지』 등의 문헌을 편찬하여 조선의 문물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정조는 왕권을 중심으로 한 정치를 더욱 공고히 하였고, 그 결과 비교적 안정된 정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탕평책의 의의와 한계
탕평책은 조선 후기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고, 붕당 정치의 폐해를 극복하려는 왕들의 시도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탕평책을 통해 왕권이 강화되었고, 붕당 간의 극심한 갈등이 다소 완화되면서 조선 후기 정치가 안정된 측면이 있습니다. 특히 영조와 정조의 치세 동안 조선은 정치적·사회적 안정기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각종 개혁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습니다.
그러나 탕평책은 근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탕평책은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을 맞추려 했지만, 오히려 왕권 중심의 정치 운영이 지나치게 강화되면서, 기존의 붕당 간 갈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억눌린 상태에 머물렀습니다. 또한, 탕평책이 시행된 후에도 특정 붕당이 여전히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으며, 결국 정조 사후 다시 붕당의 세력이 커지면서 탕평정치는 한계를 드러내게 됩니다.
특히, 정조 사후 세도 정치가 등장하면서 탕평책의 이상은 무너지고,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상황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세도 정치 시기에는 소수의 가문이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며 조선 후기의 정치적 부패와 혼란이 심화되었고, 이로 인해 왕권은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3) 세도정치
조선 후기에는 정조가 죽은 후 어린 순조가 즉위하면서 정치 세력 간의 다툼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때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일부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는 세도 정치가 발전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세도 가문인 안동 김씨, 풍양 조 씨 가문이 번갈아가며 국정을 좌지우지하였습니다. 순조, 헌종, 철종의 3대에 걸쳐 60여 년간 이루어진 세도정치는 조선사회의 정치적 환란과 부패를 가속화시키고 결국엔 국가의 쇠퇴를 촉발한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세도정치의 특징
세도정치의 대표적인 특징으로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가문이 정국을 좌지우지하였습니다. 이들은 왕실과 혼인 관계를 통해 왕권을 사실상 대리하는 역할을 했으며, 고위 관직을 독점하고 권력을 세습했습니다. 안동 김씨는 순조와 헌종 시기에, 풍양 조씨는 헌종과 철종 시기에 각각 권력을 독점하며 조선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의 정치는 소수 가문의 사적 이익을 위한 도구로 변질되었습니다. 이들은 비변사와 주요 관직을 차지하고, 과거제가 문란해져 관직을 사고파는 일이 성행하며 이로 인해 붕당 정치가 쇠퇴하며 왕권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세도정치의 폐해
세도정치 시기에는 매관매직과 같은 부정부패가 극심하게 나타났습니다. 고위 관직을 돈으로 사고파는 관행이 일반화되었고, 이를 통해 관리들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재산을 축적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로 인해 조선 사회는 점차 부패의 늪에 빠졌으며, 일반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과 부당한 수탈에 시달렸습니다.
중앙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에서도 부패가 심화되었습니다. 지방관들은 중앙의 매관매직을 통해 임명되었고, 그들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거나 착취를 일삼았습니다. 이에 정부는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문란을 진압하려고 노력하였으나 큰 효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농민들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농민 봉기와 같은 사회적 저항이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세도정치 시기 동안 조선의 왕들은 정치적으로 거의 무력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순조와 헌종, 철종 모두 외척 가문에 의해 권력이 제약되었고, 국정 운영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세도 가문은 왕권을 약화시키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국정을 운영했으며, 이는 왕조의 통치 기반을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세도정치의 부패와 혼란 속에서, 조선 후기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인물로 흥선대원군이 등장하게 됩니다. 1863년, 철종의 후계자가 없자 고종이 왕위에 올랐고,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맡게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세도정치의 폐해를 청산하고, 왕권을 강화하며, 국정을 개혁하려는 시도를 펼쳤습니다. 그의 등장은 세도정치의 종식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조선의 근대화와 개혁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게 됩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 후기 학문과 예술의 변화 (0) | 2023.11.02 |
---|---|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와 농민 봉기 (0) | 2023.11.02 |
훈민정음과 조선전기 문화의 발전 (0) | 2023.11.02 |
조선의 건국 (0) | 2023.11.02 |
고려 대몽 항쟁, 고려의 멸망 (0) | 2023.10.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