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삼국 간섭과 을미개혁
1) 삼국간섭과 을미개혁
19세기말, 동아시아는 열강들의 간섭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였습니다. 1895년 일본이 청일 전쟁 승리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요동반도를 차지하려고 하자 일본의 만주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을 끌어들여 외교적 압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이를 삼국 간섭이라고 합니다. 러시아는 극동진출, 프랑스와 독일은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를 위해 삼국간섭에 참여하였습니다. 이에 일본은 청에 요동반도를 반환하고 대신 청나라에게 추가 배상금을 받게 됩니다.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영향력이 약해진 틈을 타 조선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하여 친러 정책을 실시하였고 그 결과 1985년 10월 8일 경복궁에서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 의해 시해되고 시신이 불태워지는 비극적인 사건인 을미사변이 발생하였습니다. 을미사변 이후 일본은 관련자들을 무죄방면 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에 대한 조선의 반감은 더욱 커졌습니다.
일본은 을미사변 직후 태양력 사용, 단발령 시행, 근대적 우편 사무 실시 친위대와 진위대를 설치하는 군제개혁, 소학교설치와 종두법 시행 등의 내용을 담은 을미개혁을 실시하였고, 그 후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인해 을미개혁은 중단되었습니다.
2)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의 의의와 한계
갑오개혁과 을미개혁은 군사 제도 개혁에 소홀함을 보였고, 토지 제도의 개혁은 제외되는 등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 운동 세력의 요구내용 일부를 반영하고 근대적 제도를 수용하는 의의가 있었습니다.
2. 독립 협회와 대한 제국
1) 독립협회
1896년 서재필을 중심으로 개화파 관료와 함께 설립된 독립협회의 활동들을 보면 민중 계몽과 근대적 정치의식 고취를 위해 토론회와 연설회를 개최하였고, 독립문과 독립관의 건립을 통해 나라의 위신 수립과 자주독립 의지를 고취시켰습니다. 독립신문 발간, 만민 공동회와 관민 공동회를 통해 국민 참정권을 주장하고 근대적 의회 설립을 추진하는 등 열강의 이권 침탈을 저지하고 민중을 바탕으로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독립협회는 1898 정부에 의해 조직된 황국협회에 의해 해산되기까지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2) 대한제국과 광무개혁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세자가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하는 사건을 아관파천이라고 합니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군주권을 회복하고 일본의 영향력을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오히려 외세의 간섭이 심화되었습니다.
고종은 환국 후 국호를 '대한 제국'으로, 연호를 '광무'로 결정하고 대한국국제를 반포했습니다. 그 후 고종은 광무개혁을 통하여 구본신참을 원칙으로 황제가 육·해군 통솔, 중앙군의 수 증대, 주요 도시에 군대 주둔 등 군사 개혁과 전국의 토지 측량, 지계 발급, 근대적 회사 설립의 경제 개혁, 유학생을 파견하여 근대 산업 기술을 습득, 관립 학교 설립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국방력 강화와 근대화에는 기여하였으나 황제권에 치중하여 민권 보장에는 미흡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3. 일제의 국권 침탈과 국권 수호 운동
1) 러일전쟁
1904년 일어난 러•일 전쟁에서는 만주와 한반도를 둘러싼 갈등을 배경으로 일어났습니다. 삼국 간섭 이후 일본과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의 지배권을 놓고 갈등을 겪었습니다.
일본이 영국과 동맹 체결 후 여순항을 기습 공격하여 대한 제국의 군사적 요충지를 장악하고 러시아와의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에 대한 제국에 외국인 고문을 파견하는 등 내정간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일본이 러시아에 승리를 거두게 되고 일본과 러시아는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 러시아는 한반도와 만주에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철수하게 됩니다.
2) 국권 수호 운동
을사늑약은 군대를 동원한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체결된 조약입니다. 이로 인해 대한 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통감부가 설치되는 등 일본의 내정 간섭이 한층 더 강화되었습니다.
을사늑약에 반해 조선에서는 민영환이 자결하고,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하여 을사오적과 이토히로부미를 규탄하며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렸고, 나인영과 오기호를 중심으로 자신회(오적 암살단) 조직, 전명운·장인환의 스티븐스 사살, 안중근은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 사살 등 저항운동을 하였으며, 고종도 을사늑약의 무효화를 위해 이준, 이상설, 이위종을 헤이그 특사로 파견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은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는 한일 신협약(정미 7 조약)을 체결, 그 후 차례로 군대 해산 경찰권·사법권 박탈을 하며 국권을 강탈하다 결국 일진회를 통해 한·일 병합 여론을 조성하고 1910에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4. 독도와 간도
독도는 삼국 시대부터 삼국사기, 조선왕조 실록 등에 기록되어 있듯이 우리 영토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대한제국은 ‘대한 제국 칙령 제41호’ 반포하여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하여 독도를 관할하였습니다. 그러다 러•일 전쟁 중에 일본에 의해 불법 편입되었습니다.
간도는 고구려•발해의 옛 땅으로 백두산정계비로 청과 국경선을 설정하였습니다. 후에 청과의 국경선 분쟁이 발생하기도 하였지만, 대한 제국이 간도를 함경도의 행정구역에 편입하고 관리를 파견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남만주 철도 부설권과 탄광 개발권을 얻는 조건으로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5. 국권 수호 운동
1) 의병 운동(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
일본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는 과정에서 무력을 통한 국권 회복을 주장하는 항일 의병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 데 대표적으로 을미의병과 을사의병 정미의병이 있습니다.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배경으로 1895년부터 일어난 을미의병은 유인서, 이소응 등 양반 유생층의 주도로 일어났으며 단발령 철회 등을 주장하였지만 고종의 해산 권고로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을사조약으로 일본의 내정간섭 심화와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등을 배경으로 1905년 일어난 을사의병은 민종식, 최익현 등이 조직하였으며 태백산 호랑이로 불린 신돌석 등과 같은 평민 의병장이 등장하여 이끌었습니다. 주로 강원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지역, 충남 홍주성, 전북의 태인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단순한 위정척사를 넘어 국권회복을 위한 운동의 성격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배경으로 1907년 일어난 정미의병은 해산된 군인들의 가담으로 조직력과 전투력이 향상되어 항일 의병 전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원주에서 봉기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일어났는데 호남에서의 행쟁이 특히 치열하였습니다. 이에 13도 창의 군을 결성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으나 일제의 대토벌작전으로 실패하게 됩니다. 후에 이들은 국외로 이동하여 독립전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2) 애국 계몽 운동
애국 계몽 운동에서는 무력 저항이 아닌 교육과 산업의 발전을 통한 국권 회복이 강조되었습니다. 이 운동에 참여한 단체 중에서는 다양한 활동을 펼친 단체들이 있습니다.
보안회
1904년 설립된 보안회는 심상진, 송수만 등이 관료와 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되었습니다.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이 단체는 민중을 계몽하고, 교육과 산업의 진흥을 통해 국민적인 힘을 키우기 위해 전국적으로 선언문 발표와 성토와 연설, 대규모 집회를 열었습니다. 이로 인해 일본은 황무지 개간권을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설립되기까지 유보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방해로 인해 보안회는 활동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헌정연구회
러일전쟁으로 일본의 조선 침략이 심화되자 이준, 윤효정, 양한묵 등이 1905년 설립한 헌정 연구회는 입헌 정치 체제 수립을 목표로 활동한 단체로, 대한 제국의 체제를 개선하고 민주주의적인 통치 체제를 확립하려고 시도했습니다. 통감부 설치 후 집회가 금지되자 교육과 산업진흥의 방향으로 운동을 바꾸었지만 이 역시 일제의 탄압과 반대로 인해 활동이 어려워졌습니다. 그 후 대한자강회로 이어지게 됩니다.
대한 자강회는 1906년 설립된 단체로 민중을 계몽하고, 교육과 산업을 통한 자립을 주장했습니다. 장지연, 윤치호, 윤효정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고종의 강제 퇴위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지만 1907년 일제의 보안법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습니다.
신민회
1907년 조직된 신민회는 안창호, 양기탁, 이승훈 등이 중심이 되어 국권 회복과 공화정 수립 목표로 조직된 비밀단체입니다. 애국계몽을 위하여 오산 학교 등을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고, 자기 회사 등을 운영하여 민족 기업을 육성하였으며, 해외에서도 독립을 위해 만주 삼원보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는 등 국민적인 힘을 키우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1911년 일본이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인해 신민회의 주요 인사들이 투옥되며 해체되었습니다.
국채보상운동
국채 보상 운동은 일본의 강요로 차관을 도입, 대한 제국이 일본에 많은 빚을 진 것에 반발하여 일본에 쌓인 빚을 국민의 힘으로 갚아 국권을 수호하자는 목표로 1907년 시작된 범국민적인 모금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서상돈, 김광제가 중심이 된 대구를 시작으로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남성들은 금주와 금연을 통한 성금 모금, 여성들은 패물을 성금으로 납부하는 등 적극적인 국민의 참여로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통감부의 방해와 탄압으로 중단되었습니다.
일본의 국권 침탈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항일 의병 운동, 애국 계몽 운동, 국채 보상 운동 등을 통해 국민은 자주독립의 의지를 표출하며 역사의 흐름을 결정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투쟁은 우리 민족의 국격과 독립을 위한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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