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한국은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서양의 문물을 수용하면서 현대화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에 따라 근대 문물의 수용과 함께 사회와 문화도 크게 변화했습니다.
1. 근대 문물의 수용
(1) 근대 시설의 도입
한국은 개항 이후 서양의 과학 기술을 수용하면서 근대 시설을 도입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근대식 인쇄소로, 1889년에 설립된 박문국은 신문 및 잡지 등을 편찬·인쇄하던 출판 기관으로, 한국 최초의 신문사입니다. 박영효의 건의에 따라 설치되었으며, 통리교섭상사무아문의 산하기관인 동문학의 신문 발행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기기국은 1883년 조선 정부가 근대식 병기를 제조하기 위해 설립한 기관으로, 1884년에 군기사를 흡수 통합하여 병기제조를 담당하는 대표기구가 되었습니다. 기기국은 번사창, 숙철창, 목양창, 동모창 등 여러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는 데 그중 많이 알려진 건물은 1887년 설립된 무기공장인 기기창입니다. 기기창 설립을 위해 중국에서 기술자들이 초빙되었고, 청나라에서 무기 기술을 훈련받은 영선사 행군계학조단 유학생들이 기기창을 관리하고 운영하였습니다.
전환국은 1883년에 설립된 조선의 근대식 상설 조폐기관입니다. 전환국은 국가의 재정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화폐 주조 사업을 직접 관리하고 운영하기 위해 설치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서울에 설치되었으나, 이후 인천과 용산으로 이전되었습니다. 전환국은 근대 조폐 설비를 도입하여 다양한 화폐를 주조하였으며, 특히 백동화의 주조가 활발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백동화의 남발로 인해 화폐 가치가 하락하고 경제적 혼란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전환국은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영향으로 폐지되었습니다.
근대 의료 시설에서는 광혜원과 같은 서양식 병원이 설립되었습니다.
광혜원은 1885년 조선 정부가 설립한 최초의 서양식 병원입니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의 건의로 설립되었습니다. 광혜원은 조선인과 외국인 모두를 대상으로 서양 의술을 통한 치료와 의료선교를 실시했습니다.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무료진료를 제공했으며, 당시 유행하던 질병 치료와 수술을 시행했습니다. 개원 약 10일 후, 고종은 광혜원의 이름을 제중원으로 바꾸어 '많은 사람을 구제하는 병원'이라는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광혜원은 단순한 병원의 역할뿐만 아니라, 의학 교육 기관으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제중원 의학당을 통해 많은 의학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이는 이후 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교통에서는 서울에서의 전차 운행과 철도 부설이 이루어져 일상생활에서의 편리성이 높아졌습니다. 한국 최초의 철도는 1899년 9월 18일 개설된 노량진에서 제물포까지 이어진 경인선입니다. 경인선은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여 군사적, 경제적 장악력을 높이려는 일본의 야심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1897년 3월에 기공되었으며, 1899년 9월 첫 시험 운행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1905년 1월에 경부선(서울~부산), 1906년 4월 경의선(서울~신의주) 등이 차례로 개통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은 외세의 침략과 수탈에 이용되어 사회적 저항을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은 조선의 철도망을 확장하여 식량과 자원을 수탈하고 상품 판매 시장을 확장했습니다.
(2) 생활 모습의 변화
복식, 음식, 건축 등에서 서양 문화가 도입되면서 전통적인 생활양식과 가치관이 변화했습니다. 신분에 따른 복식의 차이가 줄어들고, 서양식 의복과 건축물이 등장함으로써 사람들의 삶이 현대화되었습니다.
장옷, 쓰개치마와 같은 전통 의복은 소멸되고, 서양식 의복과 개량 한복이 등장하였습니다. 개항 이후 조선에 돈 외국인들로부터 서양식 모자가 전해졌고, 근대화된 관직에 있던 사람들이 양복과 모자를 입기 시작했습니다, 양장으로 불리는 서양식 옷은 초기에는 관료나 상류층 남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다가 점차 상인들과 일부 여성들에게도 영양을 미쳤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식 복장을 강요하였는데 일본식 교복과 일본군복이 보급되었고, 신교육 기관에서는 서양식 교복을 입는 학생들이 등장했습니다.
서양식 식사 문화가 퍼지며 겸상이 등장하는 등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개항 이후 외국 공사관과 선교사들을 통해 빵, 커피, 설탕 등이 조선에 전해졌고, 양식 레스토랑이 한성(서울)에서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상류층 가정에서는 양식을 시도하는 사례가 나타났습니다. 일제강점기 초반에는 일본식 라면, 어묵, 도시락 등이 조선에 소개되었으며, 학교와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식 식생활은 일방적으로 강요되었고, 이는 조선의 전통 음식문화를 훼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건축은 일본식 목조 주택이 건립되고 한옥과 양옥을 절충한 집 건축, 독립문과 명동성당, 덕수궁 석조전과 같은 서양식 건축물도 지어졌습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 조선의 생활은 개항과 외세의 침략, 근대화의 흐름 속에서 빠르게 변화했습니다. 전통적 의복과 음식, 주거 형태가 여전히 유지되었지만, 서구 문물과 일본 문화가 유입되면서 조선 사람들의 일상은 점차 근대적 요소와 혼합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의 생활 문화를 더욱 다양하게 만들었지만, 전통문화와의 갈등을 초래하기도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동안 전통문화가 훼손되고 일본식 생활양식이 강요된 부작용도 뒤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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