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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성리학의 발달과 양반문화, 조선 사회를 이끈 정신과 생활양식

by 신난베짱이 2024.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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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회백자상형제기(출처:국가유산포털)

조선 시대는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양반계층이 주도한 사회였습니다. 성리학은 정치, 교육 가정 윤리를 포함해서 사회 전반 질서를 확립하는 철학이었고, 이를 실천하며 사회를 운영한 계층이 바로 양반이었습니다. 조선의 성리학과 양반 문화는 신분제 사회의 근간이자, 정치·사회·생활 방식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1. 성리학의 발달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중요한 사상으로 자리 잡았으며, 성리학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성리학은 고려 말에 들어왔지만, 조선 건국 이후 국가의 통치 핵심이념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완성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아, 인의예지와 같은 덕목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도록 권장했습니다. 군주와 신하의 관계는 임금은 덕으로 다스리고, 신하는 충성으로 보답한다는 원칙에 따라 규정되었습니다. 이러한 이념은 국가 통치와 관리 선발 제도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성리학은 가정에서도 효와 예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부모에 대한 효와 가부장적인 가족제도는 성리학적 가치관의 실천을 통해 유지되었습니다. 이러한 성리학은 왕도 정치와 사회 안정을 위한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으며, 조선 왕조의 교육과 법률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성리학에 따라 국가는 윤리서와 의례서를 편찬하여 성리학의 원칙을 백성들에게 교육하였습니다. 또한, 사림이 유교 서적인 소학과 가례(주자가례)를 보급하고 실천하면서 유교 윤리가 보다 확산하였습니다.
관혼상제의 의례에서 성리학적인 질서가 중요시되며, 양반들이 족보를 편찬하면서 윤리와 가문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양반 중심의 신분제가 강화되었습니다.

2. 성리학을 실천한 지배 계층 양반

조선시대 양반은 성리학적 가치를 실천하며 정치와 사회를 이끌어간 지배 계층이었습니다. 양반은 문반과 무반으로 나뉘어 과거 시험을 통해 관리가 되거나, 학문 연구를 통해 명예를 유지했습니다

양반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며 경제적 기반을 확보했고, 조세와 군역에서 면제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양반 가문의 제례와 혼례, 상례 등 모든 일상에서 유교 예법이 이 중시되었습니다. 예를 갖춘 제사를 통해 가문의 전통과 명예를 지키고, 혼인을 통해 신분을 유지했습니다. 양반 자제들은 서당과 향교에서 유학을 배우며 과거 시험에 대비하였습니다. 양반 사회에서는 학문적 업적이 곧 가문의 명예로 여겨졌습니다.

성리학과 양반 문화는 조선 사사회에 안정과 질서 유지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사회적 한계와 갈등도 야기했습니다. 성리학적 질서에 따라 사회는 일정한 안정성을 유지했지만, 양반 중심의 신분제는 백성들에게 불평등한 구조를 강요했습니다. 양반은 신분을 세습하여 특권을 독점하였기에 양반 이외 신분의 사회적 이동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양반 계층은 정치에 적극 참여했지만, 학문과 정치적 노선의 차이로 인해 붕당 정치가 발생하며 당파 싸움이 심화되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정치혼란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성리학적 가족 질서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를 강화하면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을 크게 제한했습니다. 여성은 가정 내에서 주로 제사 준비와 자녀 교육에만 전념하여야 했습니다.

3. 양반주도의 문화

양반들은 문학, 그림, 공예 등 다양한 분야에서 문화의 발전을 주도했습니다.

1) 문학

문학적으로는 1478년 성종 때 삼국 시대 후기부터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에 이르는 시인과 문사들의 우수한 시문을 모아 편찬한 시문집인 서거정의 「동문선」은 총 130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시문을 사(辭:사상을 말이나 글로써 나타낸 것), 부(賦:사물이나 그에 대한 감상을 비유를 쓰지 않고 직접서술 )ㆍ고시(古詩: 주로 후한 이전의 시, 시경이나 문선에 딸린 시) 등 다양한 문체로 분류하여 수록하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단편 소설집은 「금오신화」입니다. 김시습이 경주 금오산에 은거하며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만복사저포기(남원에 사는 양생이 죽은 처녀의 혼령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 이생규장전(이생과 최랑의 사랑 이야기로, 최랑이 죽은 후에도 사랑이 이어가는 내용을 담음), 최유부벽정기(홍생이 선녀와의 정신적인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 남염부주지(박생이 꿈속에서 남염부주를 다녀온 후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 용궁부연록(한생이 용황의 초대를 받아 용궁에서 대접을 받는 이야기) 이렇게 다섯 편의 단편 소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선 중기의 문인 정철이 지은 기행 가사로,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된 후 금강산과 관동 팔경을 유람하며 그 아름다움을 노래한 작품인 「관동별곡」은 서사, 본사, 결사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간과 공간의 이동에 따라 시상이 전개됩니다. 서사는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관동 지방으로 부임하는 과정과 임금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본사는 금강산과 관동 팔경의 아름다운 경치를 모사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과 함께 관찰사로서의 책임감을 나타냅니다. 결사는 꿈속에서 신선을 만나 백성을 먼저 위하고 나중에 자연을 즐기겠다는 다짐을 하며 내적 갈등을 해소합니다.

2) 그림

그림 분야에서는 조선 초기의 문신이자 화가인 강희안이 그린 산수인물화인 고사관수도가 있습니다. 이 그림은 덩굴과 높은 절벽 아래 크고 작은 바위가 있는 한적한 계곡에서 물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 선비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고사관수도는 조선 초기 선비들에게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자연과 조화로운 삶을 상징하였습니다. 

몽유도원도는 조선초기 화가 안견이 1447년에 그린 산수화로,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꾼 꿈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몽유도원도는 비단 바탕에 수묵담채로 그려졌으며, 세로 38.7cm, 가로 106.5cm의 크기입니다. 그림의 왼쪽 아랫부분에서 오른쪽 윗부분으로 이야기가 펼쳐지며, 현실 세계와 꿈속 세계를 대조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암절벽과 복사꽃이 만발한 도원의 풍경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3) 공예

공예 분야에서는 분청사기와 백자 유물이 제작되어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 조선시대는 빛나는 시기였습니다. 분청사기는 회청색 흙에 백토를 입혀 만든 도자기로, 다양한 기법으로 장식되었습니다. 고려 말 상감청자에서 유래하여 16세기 전반까지 제작되었습니다. 백자는 순백의 흙으로 만든 유약을 발라 1,300℃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낸 도자기입니다. 조선의 백자는 절제미와 우아한 품격을 지니며, 15세기부터 16세기 중엽까지 분청사기와 함께 사용되다가 이후 주류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