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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비잔티움 제국과 중세유럽, 문화와 정치적 변화를 이끌다

by 신난베짱이 2024. 4. 8.

네개의_뾰졳한탑_가운데_크고아름다운_돔_으로된_건축물
성소피아성당 그림

 

목차

    1.비잔티움 제국의 번영

    1-1. 비잔티움 제국의 발전

    비잔티움 제국은 그 시기 서유럽과는 달리 황제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를 구축하여, 황제가 정치적, 군사적, 종교적 권한을 모두 지니는 강력한 국가 체제를 마련했습니다.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성장하여, 당시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의 전성기는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기에 이르러 정점을 찍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하여 로마 법의 집대성을 이루었고, 이는 오늘날 유럽의 법률을 다지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옛 로마 제국 영토의 상당 부분을 회복하였으며, 성 소피아 대성당을 완성하여 비잔티움 예술과 건축의 대표작으로 남겼습니다.

    그러나, 황제 레오 3세가 성상 숭배 금지령을 내리고 로마 교황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동서 교회의 분열이 촉발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교회와 비잔티움 제국의 그리스 정교는 서로 분리되어 각각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11세기 이후 자영농의 몰락으로 군사력이 약화되고, 십자군 전쟁으로 인한 내부 분열과 외부 압박이 겹치면서 점차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최종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공격으로 멸망하며, 한때 번영했던 비잔티움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1-2. 비잔티움 제국의 문화

    비잔티움 제국의 문화는 그리스 정교를 기반으로 하여 그리스·로마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가 융합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건축에서는 돔과 모자이크 벽화가 특징인 비잔티움 양식성 소피아 대성당 등에 반영되어, 후세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법률은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하여 로마법을 집대성하였고, 학문 분야에서는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며,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져 고대 그리스 로마 지식의 전승과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1-3. 슬라브 문화권의 형성

    슬라브 문화권의 형성은 6세기에 슬라브족이 동유럽 지역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비잔티움 문화의 영향을 받아 슬라브 문화권이 형성되었고, 이는 9세기 말 슬라브족과 노르만족이 함께 건국한 키예프 공국에 의해 더욱 공고히 되었습니다. 9세기말에 슬라브족에 의해 건국된 키예프 공국은 동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5세기경 동슬라브인들의 무역기지로 시작되어 8세기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군주들은 동슬라브족의 여러 공국들의 종주권을 가지며 키이우 루스라는 국가를 세웠고, 10~12세기까지 키예프는 동슬라브 문화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공국은 비잔티움 문화를 수용하여 오늘날 러시아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2. 중세 유럽 사회의 변화

    2-1. 십자군 전쟁

    십자군 전쟁의 배경은 11세기 말 셀주크 튀르크의 예루살렘 점령에서 시작됩니다. 이에 대응하여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성지 회복을 위한 호소를 하며 전 유럽 기사들에게 전쟁을 촉구했습니다. 이로 인해 여러 차례에 걸친 원정이 추진되었고, 잠시 예루살렘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전쟁의 목적이 성지 회복이 아니라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변질되어, 결국 성지 회복에 실패하였습니다. 십자군 전쟁은 교황의 권위 하락과 제후 및 기사 계급의 세력 약화를 가져왔으며, 지중해 무역의 활성화를 통한 도시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또한, 비잔티움과 이슬람 문화의 서유럽 전파는 중세 유럽 문화의 다양성을 키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2-2. 도시의 발달과 장원의 해체

    중세 후기에 들어서면서 지중해 연안과 북유럽에서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도시들은 자치권을 획득하고 길드 조직을 통해 경제 활동을 조직화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상업의 발달로 화폐 사용이 증가하였으며,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감소는 노동력 부족과 농노의 처우 개선을 초래했습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농민 봉기를 촉발하고 장원제의 해체로 이어졌으며, 장원제의 핵심인 농노가 줄어들며 중세 봉건 사회의 기반을 흔들었습니다.


    2-3. 교황권의 쇠퇴와 중앙 집권 국가의 등장

    교황권의 쇠퇴는 성직자에 대한 과세 문제로 교황과 프랑스 국왕 간의 대립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대립은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겨져 프랑스 왕의 통제를 받게 되는 아비뇽 유수 기간으로 이어졌습니다. 아비뇽 유수는 14세기 당시 이탈리아 로마에 있던 교황청을 신성 로마 제국이 강제적으로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옮겨 1309년부터 1377년까지 머무르게 한 사건을 말합니다. 아비뇽 유수 기간 동안, 모두 7명의 교황이 아비뇽에서 생활했습니다. 이 기간에 교황청은 프랑스 남부로 이전되었으며, 프랑스 왕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 의존하게 됩니다. 이 시기를 거치며 교황의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한편, 중앙 집권 국가의 등장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두드러졌습니다. 프랑스는 서유럽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된 군사 분쟁 중 하나인 백년전쟁에서 잔 다르크의 활약을 통해 승리하며 중앙 집권 국가로 발돋움했고, 영국 내부에서는 30년간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가 사이에서 왕위 쟁탈전으로 장미 전쟁이 발발했으며, 이 전쟁으로 튜더 왕조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많은 제후와 기사가 몰락하며 튜더 왕조의 헨리 7세에 의해 잉글랜드의 절대주의 시작되게 됩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중세 유럽 사회가 겪은 복잡한 변화를 보여주며, 유럽의 절대주의 국가들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