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의식은 신분제 폐지, 독립 협회의 활동, 애국 계몽 운동 등을 통해 성장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평등 의식이 확산되었고, 근대적인 사회 구조의 모색이 시작되었습니다.
1. 교육의 확대(근대 학교 설립)
개항 초기 1883년 함경남도 원산에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원산학사가 설립되었습니다. 이 학교는 덕원부사 겸 원산감리 정현석의 주도로 설립되었으며, 서북경략사 어윤중과 통리기무아문 주사 정헌시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원산학사는 외부 세력에 의지하지 않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손으로 설립된 최초의 근대학교로서 한국 근대사에서 지니는 의미가 큽니다.
국가에서 설립한 근대학교로는 1883년 김윤식이 청나라의 동무관을 본떠 설립한 외국어 교육 기관으로 영어와 일본어를 가르치는 동문학이 있습니다. 동문학은 통역관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후 영어 구사 인재의 필요성에 따라 운영되었습니다. 1886년 육영공원이 설립되면서 폐지되었습니다.
육영공원은 1886년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 명문귀족 공립학교로, 영어를 비롯한 근대적 지식을 교육했습니다. 좌원과 우원으로 나누어 젊은 관료와 양반 자제를 대상으로 교육했습니다.
동문학과 원산학사 설립 이후 개신교 선교사에 의해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등 여러 학교가 설립되었고 갑오개혁 시기에 급격한 확대를 이루었습니다.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설립한 학교로, 영어, 산수, 지리, 화학 등을 가르쳤습니다. 고종이 '배양영재'에서 이름을 따와 '배재학당'이라 명명했습니다.
이화학당은 1886년 메리 스크랜턴 부인이 설립한 여학교로, 영어와 서양 문화를 가르쳤습니다. 교정이 배꽃이 많이 피는 지역에 위치한 학교라 하여 '이화학당'이라 명명하였습니다.
관립 학교와 사립학교가 설립되어 교육 기회가 확대되었고, 대한 제국 시기에는 상공 학교와 광무 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상공학교는 1899년에 설립된 대한제국의 실업교육기관입니다. 고종 황제의 칙령에 따라 설립되었으며, 농업, 상업, 공업을 가르쳤습니다. 그 후 1904년에 농상공학교로 개편되었고, 이후 여러 전문학교로 발전했습니다. 광무학교는 광업에 필요한 지식을 교육하는 학교로, 광무개혁 시기에 설립되었습니다. 이 학교는 광업 기술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당시 대한 제국의 근대화 노력의 일환이었습니다.
이러한 근대학교들은 국민들의 교육 수준 향상과 국가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특히, 애국 계몽운동 시기에는 많은 사립학교가 설립되어 민족의식이 고취되었습니다.
2. 언론의 발달
언론은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한성순보, 독립신문,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이 등장하여 정부의 개화 정책을 선전하고, 국내외 정세 소개로 국민들의 의식을 형성했습니다.
한성순보는 1883년 10월 31일에 창간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신문입니다. 이 신문은 조선 정부의 통리아문 박문국에서 발행하였으며, 열흘에 한 번 발행되며, 순 한문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주로 정부 시책과 국내외 정세를 알리는 관보의 형태를 띠었습니다. 한성순보는 갑신정변으로 인해 1884년 12월에 발행이 중단되었으나, 1886년에 한성주보로 다시 발행되었습니다. 이 신문은 개화파 인사들이 신문을 통해 국내외 정세를 파악하고 개화정책을 추진하려는 목적으로 발행되었습니다.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에 창간된 한국 최초의 민간 신문이자 한글과 영문으로 발행된 신문입니다. 서재필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의 기관지로 발간되었으며, 미국 감리교 선교서 호머 헐버트가 신문 창간과 발행 작업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좀 더 많은 사람들과 외국인들을 위해 순 한글과 영어로 작성된 독립신문은 신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칼럼을 투고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신문은 국민 계몽과 자주독립을 목표로 하였으며, 다양한 국내외 소식과 새로운 지식을 소개하였습니다
제국신문은 1898년 8월에 이승만, 유영석, 이종일 3인이 주도하여 창간된 신문으로, 순 한글로 발행되었습니다. 주로 하층민과 부녀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한국의 문명개화 및 국권 수호와 관련된 계몽주의적, 민족주의적 성격의 기사를 많이 실었습니다. 대한제국 정부의 잘못을 비판하고 자주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 내용을 주로 다루었습니다.
황성신문은 1898년 9월 5일에 남궁억과 나수연 등이 중심이 되어 창간된 대한제국의 일간 신문입니다. 국한문혼용체로 발행되었으며, 애국적 논조로 일관하며, 주필로는 유근,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 등이 활동하였습니다. 특히 1905년 을사조약에 대한 장지연의 항일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유명합니다. 황성신문은 1910년 일제강점기 경술국치 직후에 강제로 폐간되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 7월 18일에 양기탁과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대한 제국에 특파원으로 머무르던 영국인 기자 어니스트 베델이 함께 창간하였으며 일제에 비판적인 기사를 많이 게재하고 국채보상 운동을 적극적으로 홍보하였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항일 논설을 자유롭게 실을 수 있었고, 일반 민중의 지지도가 높았습니다. 주요 논설진으로는 양기탁 외에 신채호, 박은식 등이 있었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로 전환되었고, 이후 서울신문의 전신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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