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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광해군의 중립외교와 호란의 발발, 조선 외교사의 비극적 선택

by 신난베짱이 2024. 11. 15.

네개의_붉은기둥_한국식목조건물
남한산성 숭렬전 정면(출처:국가유산포털)

1. 중립 외교의 배경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큰 피해를 입었고, 국토는 황폐화되었으며 경제력과 군사력 또한 약화된 상태였습니다. 전쟁을 통해 조선은 명나라와 깊은 외교적 연대를 형성했지만, 전쟁 직후 후금이 세력을 키우며 명나라와 갈등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으로서는 전통적 동맹국인 명나라를 저버릴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후금의 강력한 군사력을 무시하기 어려운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광해군은 조선의 안정을 위해 명과 후금 사이에서 어느 한 편도 들어서는 안된다는 판단을 내렸고, 그는 국익을 우선시하는 중립 외교를 선택하게 됩니다.

2.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전통적인 사대 외교에서 벗어나 조선의 생존과 자주성을 중시한 것이 특징입니다.

1) 강홍립 파견과 중립 외교의 상징

광해군은 1619년, 명나라가 후금을 공격하는 심하 전투에 조선군의 파견을 요청했을 때, 강홍립을 지휘관으로 삼아 명나라에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명나라 군대가 불리할 경우 후금에 투항하라"는 비밀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조선이 전면전을 피하고,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막기 위한 광해군의 실리적 판단이었습니다.

이 결과 강홍립은 전투에서 후금에 항복했고, 조선은 후금과의 관계 악화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조선 내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명에 충성을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후에 광해군이 폐위당하는 데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명나라와의 외교 유지

광해군은 전통적 동맹국인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도 유지했습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명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않기 위해 적극적인 사대 외교를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는 명나라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냈고, 전통적인 외교 의례를 지키며 명나라와의 우호를 다지려 했습니다.

후금과의 관계 관리

후금이 세력을 확장할 때 광해군은 전쟁을 피하기 위해 후금과도 우호적이 태도를 취했습니다. 예를 들어 후금이 조선에 사신을 보낼 경우 이를 받아들이며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으려 했습니다. 후금의 요구에 따라 무역을 허용하고, 필요할 때 소규모 선물을 보내며 후금과의 외교적 균형을 유지하고자 하였습니다.

2) 중립 외교의 성과와 한계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조선에 상당한 안정을 가져다주었고,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외교적 중립을 통해 광해군은 조선의 경제 회복과 국방 재건을 추진할 수 있었으며, 조선 백성들은 잠시나마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당시 조선 조정 내에서 많은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명나라에 대한 절대적인 의리를 강조했으며, 명에 충성하지 않고 후금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는 광해군의 정책을 비판했습니다. 이는 광해군이 사대부의 지지를 잃고 정치적 고립에 빼지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광해군이 폐위된 후 인조반정으로 즉위한 인조는 명분을 중시한 외교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이후 후금이 조선을 공격하여 정묘호란(1627)이 발생하게 됩니다.


2. 호란의 발발과 영향

호란(胡亂)은 17세기 조선이 후금(청)의 침략을 받은 두 차례의 전쟁으로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 두 전쟁은 조선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의 외교적 갈등 속에서 발생하였으며, 조선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후 조선에서 북벌론과 실리 외교 등의 대책 논의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 호란의 배경

호란의 배경에는 명나라화 후금(훗날 청)의 대립이 있었습니다. 후금은 1616년에 누루하치가 건국한 국가로, 만주 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며 명나라와의 대립이 격화되었습니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명나라와 사대 관계를 유지해 왔고, 명의 요청에 따라 후금과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명나라 문화와 정치의 중심으로 여기는 소중화 (小中華) 사상을 바탕으로 전통적으로 명을 지지했습니다. 이에 따라 후금의 성장을 경계하며 명나라와의 외교적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때 후금은 강력한 군사력으로 명나라와 주변 국가들을 압박하였고, 조선에도 우호관계와 군량미 지원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반정에 성공한 인조와 서인정권은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며 후금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이에 후금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2) 정묘호란

정묘호란은 1627년에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시작된 전쟁으로, 이괄의 난(1624)이 그 원인이 되었습니다. 조선 내에서 반란이 일어나며 국력이 약화된 상황을 틈타 후금이 침략한 것입니다.

후금은 아민과 용골대를 중심으로 3만여 병력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습니다. 후금은 의주, 평양 등 서북부 지역을 점령하고, 빠르게 남진하였습니다.

조선의 인조는 후금 군사력에 밀려 강화도로 피신했고, 관군과 의병이 후금에 맞서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는 조건으로 강화 협상을 통해 전쟁을 종결하기로 합니다. 

3) 병자호란

병자호란(1636)은 청(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꿈)이 다시 조선을 침략한 전쟁입니다. 정묘호란 이후 수금은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하고 조선 내에서 척화론과 주화론(주전론)이 대립하다 척화론에 따라 조선 정부가 후금의 요구를 거절하며 배척하게 됩니다. 이에 청은 조선의 복속을 요구하며 다시 침략하게 됩니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직접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고, 청군은 한양으로 빠르게 진격했습니다. 조선의 방어선은 무너졌고, 인조는 결국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습니다.

인조와 조선 조정은 남한산성에서 약 45일간 청군에 저항했으나 결국 인조는 1637년 1월에 청에 항복하고, 삼전도(지금의 서울 잠실)에서 굴욕적인 강화 조건을 수락합니다. 조선은 청에 대해 군신 관계를 맺고, 세자와 대신들 백성들이 청에 끌려가 많은 고통을 겪게 됩니다.  

4) 호란의 결과와 영향

호란 이후 조선은 큰 충격을 받았고, 청에 대한 원망과 복수심이 강하게 남았습니다. 

 

호란으로 인해 굴욕적인 피해를 당한 조선을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청나라를 정벌하고 명나라의 옛 영토를 회복하자 주장하는 북벌론이 제기되며 효정 대에 이르러 본격화되었습니다. 효종은 북벌을 위해 군사력을 강화하고, 경제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송시열, 송준길 등 유능한 인재들을 등용하여 군사 훈련을 강화하고, 성지 (城池)를 개수하며,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 일행을 통해 서양의 군사 기술을 도입하려 했습니다. 그라나 효종의 불벌계획은 청나라의 강력한 군사력과 내부적인 반대, 그리고 효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호란 이후 조선은 여러 가지 정책을 통해 국가를 재건하고 안정시키려 했습니다.

사회 경제적으로는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난민들을 지원하고, 농업과 상업을 장려했습니다. 

또한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성곽을 보수하고 새로운 성을 축조하여 방어력을 높였습니다.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군사 훈련을 체계적으로 실시했습니다. 

외교적 변화도 나타나게 됩니다. 조선은 호란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실리 외교를 지향하게 됩니다. 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외교적 안정성을 유지하려 했으며, 이를 통해 내부적으로는 국력을 다지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