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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전두환과 12.12 사태 대한민국 현대사의 군사 쿠데타 비밀

by 신난베짱이 2024. 12. 5.

많은_마이크_앞에서 _군복을_군복을_입고_기자회견을하는_전두환_흑백사진

1. 배경: 10·26 사태 이후의 혼란

1979년 10월 26일,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하면서 대한민국은 정치적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박정희 유신체제의 붕괴가 시작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군부 내 권력 다툼도 격화되었습니다.

이 시기 국방부 장관이던 정승화 육군참보총장이 유신체제를 비판하며 군부의 안정화를 시도했으나, 군 내부에는 그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었습니다. 특히 전두환 소장(보안사령관)과 노태우 소장(9 사단장)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회(군부 사조직) 세력은 기존 군부 수뇌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자신들의 지배권을 확립하려고 했습니다. 

정승화 융군참모총장은 박정희의 최측근이었지만, 유신체제 붕괴 후에는 유화적인 자세로 정치적 안정을 꾀했습니다. 신군부는 정승화를 제거하는 권이 권력 장악의 첫걸음이라고 판단했습니다. 

12월 초 전두환은 정승화를 김재규의 10·26 사건과 연결 지으려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조사를 확대했습니다. 이를 통해 정승화가 쿠데타를 막으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리며 명분을 쌓았습니다.

2. 12.12 사태의 전개과정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 작전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당시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으로서 군 내부 정보기관을 총괄하며 이미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10·26 사태 수사를 담당하던 중, 정승화 총장을 김재규와 연계된 인물로 몰아 체포 명분을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권력을 장악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날 저녁, 전두환은 보안사 병력을 동원해 서울 용산에 있는 육군본부로 이동시켰습니다. 김진기 소령을 포함한 보안사 요원들이 정승화 총장이 머물고 있던 육군본부를 급습하여 그를 체포하려 하였고, 정승화 총장은 자신에 대한 체포가 부당하다고 강하게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보안사 병력에 의해 무력으로 제압당한 정승화 총장은 결국 보안사로 강제 연행되었습니다.

정승화 총장의 체포 소식은 즉시 서울 지역 방위를 담당하고 있던 수도경비사령부로 전해졌습니다.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장군은 이를 군사 쿠데타로 간주하고 강력히 반발하며, 수도경비사령부 병력을 동원하여 정승화 총장을 석방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로 인해 서울 시내에는 긴장감이 고조되었고, 대규모 충돌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이에 전두환은 노태우가 지휘하는 9사단 병력과 특전사(공수부대)를 서울로 신속히 이동시켜 수도경비사령부를 압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경사와 특전사 간의 충돌 위기가 고조되었으나, 신군부가 수도경비사령부의 주요 거점을 차례로 장악하면서 장태완 장군은 결국 병력을 철수시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이 작전은 신군부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습니다. 전두환은 정승화 총장을 직무 정지시키고 자신들의 지지 세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하면서 군 지휘 체계를 완전히 장악하였습니다. 이로써 신군부는 군사적 권력을 기반으로 정치권력까지 확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3. 신군부의 권력 장악

2.12 사태 이후 신군부는 군부의 실질적인 지휘권을 장악하며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사건 당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한 이후, 신군부는 그의 직무를 정지시키고 자신들의 측근을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임명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군 내부의 기존 지휘 체계를 무력화하고, 신군부 중심으로 재편하는 과정을 빠르게 진행하였습니다.

신군부는 군사적 충돌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수도경비사령부와 같은 반대 세력을 성공적으로 억누르며, 군 내부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특히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김재규의 10·26 사건 수사 권한을 이용하여 정승화와 그 지지 세력을 10·26 사건과 연관된 인물로 몰아 군 내부의 혼란을 유발하였고, 이를 명분으로 자신들의 군사 작전을 정당화하였습니다.

또한, 신군부는 특전사(공수부대)와 보안사 병력을 주요 도구로 활용하여 서울 시내의 군사적 요충지를 장악하고, 반대 세력의 움직임을 사전에 차단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신군부는 군사적 기동성과 조직력을 바탕으로 다른 군 병력을 통제하며 자신들의 세력을 더욱 확대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신군부는 육군뿐만 아니라 군 전체의 지휘권을 실질적으로 통합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정치권력까지 확대할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4. 이후의 상황: 결과와 영향

1980년으로 접어들면서 신군부는 군사적 지배에 만족하지 않고 정치적 권력 장악을 위해 본격적인 움직임을 시작하였습니다.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국회를 해산하며 정치 활동을 전면 금지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대중, 김영삼 등 민주화 세력과 주요 야당 정치인들이 구속되거나 정치적 활동이 제한되었습니다. 또한 대학가를 중심으로 확산되던 민주화 요구와 시위를 무력으로 억압하며 군사 정권을 정당화하려 하였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곧바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광주에서 발생한 시민들의 저항은 신군부의 계엄군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신군부의 폭력성과 독재 체제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았습니다.

결국 12.12 사태를 통해 군사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은 1980년 8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군사 정권을 공식화하였습니다. 이후 신군부는 유신체제의 잔재를 이어받아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을 강화하였고, 이는 1987년 6월 민주항쟁까지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12.12 사태 이후의 상황은 군사적 권력이 정치적 권력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며, 이는 한국 사회가 군부 독재 체제를 극복하고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를 명확히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