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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헨리 8세의 자녀들, 에드워드 6세와 메리 1세의 극적인 통치

by 신난베짱이 2024. 11. 26.

검정색 베레모와 붉은 옷을 입은 소년

 

1. 에드워드 6세 : 잉글랜드 최초의 개신교 군주

에드워드 6세(1537 ~1553)는 헨리 8세와 세 번째 왕비 제인 시무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헨리 8세의 유일한 합법적인 남자 후계자였으며, 1547년 왕위에 올라 짧지만 의미 있는 통치를 했습니다. 에드워드 6세의 통치는 개신교의 확립과 성공회 강화의 시기로, 잉글랜드를 개신교 국가로 전환한 시발점으로 평가 받습니다.

1) 에드워드 6세의 유년기와 즉위

에드워드 6세는 1537년 10월 12일, 헨리 8세와 제인 시무어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헨리 8세의 강렬한 후계자 열망 속에서 태어난 아들로, 어머니 제인 시무어는 에드워드를 낳은 후 산욕열로 사망했습니다. 에드워드는 왕위 계승자로서 철저히 교육받았으며, 라틴어, 그리스어, 신학 등 학문적 소양과 함께 개신교 교리에 기반한 종교 교육을 받았습니다.

1547년, 헨리 8세가 사망하자 에드워드는 9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나이가 어린 에드워드가 실질적인 정치를 수행할 수 없었기에, 그의 통치는 섭정 정부에 의해 운영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외삼촌인 서머셋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가 섭정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가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2) 종교 개혁과 성공회의 확립

에드워드 6세는 잉글랜드를 본격적인 개신교 국가로 전환한 군주로 평가받습니다. 그의 섭정 정부는 헨리 8세가 시작한 종교 개혁을 더욱 강화하며, 가톨릭 교리를 철저히 배제하고 성공회를 정비했습니다.

1549년, 섭정 정부는 잉글랜드 성공회의 공식 예배서를 개정한 《공동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를 도입했습니다. 이 예배서는 라틴어가 아닌 영어로 작성되어 개신교 교리를 바탕으로 했으며, 모든 교회에서 사용을 의무화했습니다. 이는 종교의식을 평민들에게 친숙하게 만들며, 성공회를 대중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가톨릭식 미사와 성상 숭배가 금지되었고, 교회의 재산은 몰수되었습니다. 성직자 결혼이 허용되었으며, 성찬 의식도 개신교식으로 단순화되었습니다. 헨리 8세가 시작한 수도원 해체 작업이 계속 진행되어, 교회의 경제적 기반이 약화되었습니다.

이러한 개혁은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켰습니다. 1549년, 가톨릭을 지지하는 농민 반란인 프라이머리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섭정 정부는 이를 무력으로 진압했습니다.

3) 외교와 군사 정책

에드워드 6세의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 및 프랑스와 갈등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섭정 정부는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일명 "러프 우잉(Rough Wooing)")을 통해 두 왕국을 결혼 동맹으로 통합하려 했습니다.

서머셋 공작은 에드워드와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Mary, Queen of Scots)을 혼인시키려는 시도를 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이 전쟁은 스코틀랜드와 프랑스 간의 동맹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1550년, 노섬벌랜드 공작은 프랑스와 조약을 맺어 평화를 회복하고 칼레 지역에 대한 잉글랜드의 통제권을 보장받았습니다.

4) 짧은 생애와 죽음

에드워드 6세는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1553년 결핵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불과 15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에, 자신의 통치 철학을 온전히 구현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에드워드는 죽기 전 가톨릭 신자인 이복누나 메리 1세의 왕위 계승을 막기 위해, 개신교를 지지하는 제인 그레이(Edward의 사촌)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제인 그레이는 불과 9일 간만 여왕으로 존재한 후 실각했습니다.

에드워드 6세의 통치는 짧았지만, 잉글랜드 종교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는 헨리 8세가 시작한 종교 개혁을 계승하여 잉글랜드를 본격적인 개신교 국가로 만들었으며, 성공회의 체계를 강화했습니다.

비록 그의 사망 이후 메리 1세의 가톨릭 복귀 시도로 인해 많은 개혁 정책이 일시적으로 뒤집혔지만, 에드워드 6세가 남긴 개신교적 유산은 이후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에서 다시 부활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짧은 통치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를 오늘날의 성공회 국가로 이끈 첫걸음을 내디딘 군주로 기억됩니다.

 

메리 1: 첫 여성군주

메리 1(1516~1558)는 헨리 8세와 첫 번째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의 여성 군주입니다. 그녀는 가톨릭 복귀를 목표로 강력한 종교 정책을 펼쳤으며, 그 과정에서 잔혹한 탄압으로 인해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통치는 종교적 열정만큼이나 정치적, 개인적 비극으로 가득 찼으며, 잉글랜드 역사에서 짧지만 강렬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1) 메리 1세의 유년기와 정치적 소외

메리 1세는 1516년 2월 18일,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어머니 캐서린과 함께 가톨릭 신앙을 철저히 교육받았으며, 뛰어난 학문적 소양을 쌓았습니다.

하지만 헨리 8세가 앤 불린과의 결혼을 위해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하면서, 메리는 정치적으로 소외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와 강제로 분리되었으며,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하고 사생아로 간주되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은 그녀의 신념과 성격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가톨릭 복귀에 대한 강한 의지를 심어주었습니다.

1544년, 헨리 8세의 왕위 계승법에 따라 메리는 다시 왕위 계승권을 회복했으나,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의 통치 아래에서도 정치적 압박과 종교적 소외를 겪었습니다. 에드워드 6세는 잉글랜드를 개신교 국가로 만드는 데 주력했으며, 가톨릭 신자인 메리는 지속적으로 개신교로 개종하라는 압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메리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자신의 신앙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2) 왕위 계승과 즉위

1553년 에드워드 6세가 사망하자, 메리는 그의 유언에 따라 제인 그레이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저지하고 왕위를 주장했습니다. 메리는 민중의 지지를 얻어 제인 그레이의 9일간의 짧은 통치를 끝내고 잉글랜드의 왕좌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잉글랜드의 첫 여성 군주로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즉위 초기에 메리는 정치적 반발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과의 관계를 복원하고, 잉글랜드를 다시 가톨릭 국가로 되돌리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3) 가톨릭 복귀 정책

메리 1세의 통치의 중심에는 가톨릭 복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가 실행한 종교 개혁을 되돌리고, 잉글랜드를 다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품으로 돌려놓기 위해 강력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1554년, 메리는 로마 교황과의 관계를 복원하고 잉글랜드 성공회를 폐지했습니다. 교황은 메리의 복귀를 환영하며, 잉글랜드의 가톨릭 교회를 다시 한번 로마의 지배 아래 두게 되었습니다.

왕위에 오른 후, 메리는 헨리 8세의 수장령(Act of Supremacy)을 폐지하고 잉글랜드 성공회를 로마 교황청과 다시 연결하려 했습니다.

메리는 개신교 신자들을 철저히 탄압하며, 많은 반대파를 처형했습니다.

약 300명 이상의 개신교 지도자와 신자가 화형 당했으며, 이는 그녀가 "피의 메리(Bloody Mary)"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때 처형당한 대표적인 인물은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가 있습니다. 그는 잉글랜드 성공회의 초대 캔터베리 대주교로, 헨리 8세와 에드워드 6세의 개신교 개혁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메리는 그를 가톨릭 반역자로 규정하고 처형했습니다. 크랜머는 마지막 순간 개신교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수하며 화형 당했습니다.

다른 인물로는 니콜라스 리들리(Nicholas Ridley)와 휴 라티머(Hugh Latimer)가 있습니다. 이 두 주교는 개신교 신앙을 설파한 혐의로 체포되어 옥스퍼드에서 화형 당했습니다. 이들은 화형을 당하며 개신교 신앙에 충성을 맹세했고, 이들의 죽음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순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메리는 개신교 교리와 문헌의 확산을 막기 위해 모든 개신교 서적을 금지하고, 개신교 설교자들에게 활동을 중단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는 개신교 신앙의 전파를 막으려는 시도로, 잉글랜드 전역의 교회에서 가톨릭 의식과 교리를 다시 부활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메리의 통치 기간 동안, 개신교 신자들은 종교 재판을 통해 반역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화형과 같은 공개 처형을 당했습니다. 공개 처형은 개신교 신자들에게 공포를 주려는 목적이 있었지만, 오히려 희생자들을 순교자로 만들며 개신교 진영의 반발을 부추겼습니다.

4) 필립 2세와의 결혼

1554년, 메리는 스페인의 필립 2세와 결혼하며 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메리는 이 결혼을 통해 가톨릭 복귀를 더욱 강력히 추진하려 했으나, 이는 잉글랜드 내에서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잉글랜드 국민들은 스페인이 잉글랜드를 지배하려 한다는 두려움을 느꼈고, 필립 2세와의 결혼은 정치적 위기를 초래했습니다. 1554년 와이어트 반란이 발생했으며, 이는 메리의 통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메리는 필립과의 결혼에서 후손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두 차례에 걸쳐 임신한 것으로 보였으나, 이는 모두 거짓 임신으로 밝혀졌고, 이는 메리에게 큰 정신적 타격을 주었습니다.

5) 메리  1세의 말년과 죽음

메리 1세의 통치는 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이루어졌으며, 그녀는 1558년 11월 17일 사망했습니다. 사망 원인은 자궁암으로 추정되며, 그녀의 죽음은 잉글랜드의 가톨릭 복귀 시도를 끝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메리가 남긴 종교적 유산은 그녀의 이복동생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하면서 대부분 철회되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다시 잉글랜드 성공회를 복원하며 개신교 국가로 되돌렸습니다.

 

메리 1세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극단적인 종교 정책으로 기억되지만, 그녀의 통치는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녀는 잉글랜드의 첫 여성 군주로, 후대 여성 군주들에게 중요한 선례를 남겼습니다. 그녀의 강력한 가톨릭 복귀 시도는 잉글랜드 종교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개신교와 가톨릭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메리의 결혼과 정책은 잉글랜드 국민들에게 가톨릭에 대한 반감을 심화시키며, 이후 엘리자베스 1세 통치 아래에서 개신교 국가로의 전환이 더욱 확고해지게 했습니다.

메리 1세는 비극적인 삶과 통치로 인해 대중적으로는 부정적으로 평가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잉글랜드의 정치적, 종교적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